소주
CEO를 비롯한 임원진과 신입사원 석식이 마련됐다. 영업맨 출신인 CEO는 주당으로 유명했는데, 과장님 지시로 내가 CEO 옆에 앉게 됐다. 술을 제법 잘 마신다고 자신했기에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영광이었다.
신입사원의 긴장과 열기가 섞인 술자리는 들썩였다. 고기가 익어가고 술잔이 채워지고 건배가 오고 가며 들썩임은 점점 수위를 높였다. 합숙 교육 중으로 강제 금주하던 20대 청춘들 앞에 술이 놓였으니 이들은 물 만난 물고기가 따로 없었다.
술잔이 빨리 비어 연거푸 따르느라 이야기가 끊긴다며 한 번에 따라 놓자던 말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뒤 내가 앉은 테이블은 잔을 바꿨다. 맥주잔에 소주가 채워졌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투명함이 넘실거리는 잔을 바라보는데 맞은편에서 신호를 보내왔다. 건배 제의를 하란다. 이성보다 패기가 앞서던 시절, 머뭇거림을 모르던 나는 넘실거리는 잔을 들고 일어섰다.
소주가 가득 따라진 맥주잔을 들고 일어서자 군데군데 걱정 섞인 탄식이 들렸지만 활짝 피운 미소로 의연함을 드러냈다. 소주 한 병 반은 너끈한 주량인데 지금까지 먹은 술에 이 맥주잔을 더 해도 한 병 반에 못 미쳤기에 실제로 자신이 있기도 했다. 호기롭게 벌컥벌컥 소주를 삼켰다. 완전히 꺾어져 텅 빈 잔을 뒤집은 채로 머리 위에서 흔드는 퍼포먼스까지 마친 뒤 자리에 앉았다.
얼음물로 쓰린 식도를 가라앉히는데 눈앞에 목구멍을 열고 내 빈 잔을 향하고 있는 소주병이 보였다. 그 악랄한 소주병을 들고 있는 사람은 CEO였다. 분명 소주잔과 맥주잔이 나란히 놓여 있는데 CEO가 든 소주병이 향한 잔은 맥주잔이었다. 설마 또 원샷? 쓰린 속이 확 조여드는 신체 반응과는 상관없이 태연한 미소를 띠며 맥주잔을 들었다.
“천천히 마셔요.”
어른이 주신 잔은 바로 내려놓으면 안 된다는 주도를 실천하며 천천히가 아닌 꿀꺽꿀꺽 두 번을 넘기니 반 잔이 비워졌다. CEO께서는 주당답게 물처럼 맥주잔의 소주를 마시고 계셨는데, 신입사원의 패기를 보여야 한다는 강박에 따른 행동이었다.
한번 맥주잔에 마시기 시작하니 다들 맥주잔을 채워주셨고, 임원들께도 술을 받다 보니 금세 주량을 초과했다. 게다가 소주를 맥주처럼 급하게 마시기까지 했으니 괜찮을 리가 없었다. 속도 일렁이고 머리도 일렁이고 눈앞도 일렁였다. 이 자리에 버티고 있다가는 분명 일을 칠 것 같았다.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벗어났다.
화장실도 지나쳐 밖으로 나선 나는 구석에 앉아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아무도 안 보이는 곳에서 술을 깰 요량이었다. 자울자울 아득해지는 생각을 깨웠다 재웠다를 반복하며 얼마나 시간을 흘려보냈을까. 멀리서 내 이름이 들렸다. 흐릿한 생각을 붙들고 몸을 일으키니 어둠 속을 살피는 인영이 다가왔다.
“괜찮아?”
괜찮다고 답했지만 괜찮지 않았다. 내게서 나는 알코올 냄새가 아찔했다.
“이제 끝나가. *** 상무님이 너 찾으셔서.”
“*** 상무님도 맥주잔에 드시나? 더는 못 마시겠는데.”
다행히 술집에 들어서기 전 모두가 밖으로 나왔다. 술자리가 끝난 것. 나는 잠시 쉬며 술을 깼는데 멈춤 없이 술을 들이켠 사람들은 다들 취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CEO는 가게 앞 평상에 올라섰고, 그 앞에 몰려선 신입사원들은 팔을 하늘로 뻗으며 회사 이름과 CEO 이름을 연호했다. 사이비 교주를 향한 교인들의 외침으로 보였다.
소주를 소주잔이 아닌 맥주잔으로 과하게 마신 사람들은 과하게 취해 배웅마저 과했다. 한발 물러서서 그 장면을 바라보는데 자연스레 주변을 살피게 됐다. 다행이었다. 술집에 손님은 우리뿐이었고, 외진 곳에 있는 술집 주변은 조용했다. 회사가 종교집단으로 둔갑한 모습을 감추고 싶었다. 더 거세지기만 하는 외침을 들으며 나는 나를 데리러 나왔던 동기의 건배 제의를 떠올렸다.
“지금 마시는 술은 술이 아니라 사장님이자 선배님의 사랑입니다. 사랑 가득 먹고 회사에 보탬이 되는 인재로 성장하겠습니다.”
이런 과한 사랑은 외려 해가 되지 않을까. 입 안에 남아 있는 알코올향이 쓰디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