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낮맺

맥주

by 여유수집가

저 멀리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예보는 거짓말이 아닌 듯 파도는 거셌고 구름은 가득했다. 늘 가던 바다를 벗어나 제주 동쪽 스노클링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코난 비치’에 갈 계획을 세웠지만 계획으로 끝냈다. 파도가 거세 모래가 뿌옇게 일어나 바닷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제보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미 바다에 가겠다고 설렌 마음을 접을 수는 없었다. 아직 태풍은 멀리 있고 해안가 접근이 통제된 것도 아니니 늘 가던 바다로 나섰다. 여기도 바닷속이 안 보이면 스노클링은 말고 튜브 타고 놀겠다며 이번에는 튜브도 챙겼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나와는 상관없는 계획이다. 나는 어디로 가든 따라가서 트렁크나 캠핑 체어에 앉아 있을 테니.


제주에 살면 당연히 즐길 것 같지만, 즐기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 바다 물놀이. 바다이건 수영장이건 물놀이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바다는 모래의 까칠거림과 소금물의 끈적임까지 보태지니 더욱 싫었다. 그저 눈으로 바라보고 귀로 파도를 듣고 코로 짠 내음을 들이켜면 그걸로 바다는 충분했다. 촉각까지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달랐다. 구명조끼와 스노클링 마스크만 있으면 바다에 들어가 나올 줄을 몰랐다. 입술이 파래져서 쉬어야만 한다고 설득해야 나올까 말까였다.


제주로 온 첫해에는 내가 싫어도 아이는 좋아하니 견디는 것이 엄마라며 아이와 단둘이 바다로 나섰다. 사람이 많으면 더 싫으니 아침 9시에 바다에 도착해 오전 시간을 꽉 채우고 돌아왔다. 친구네와 일정을 맞춰 나서기도 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제주 바다라도 싫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름 내내 거듭되는 물놀이에 집까지 모래가 자글거리니 어떻게든 물놀이를 피할 궁리만 하게 됐다. 제주살이 두 해째부터는 선을 명확히 그었다. 입수 물놀이는 아빠가 제주에 왔을 때! 엄마랑은 산책길에 반바지 아래까지만 들어가 파도 넘기를 하는 것으로.


올해도 어김없이 여름이 됐고, 남편은 일주일 휴가를 내서 제주를 찾았다. 아이가 바다 물놀이를 만끽할 시간. 내내 아이와 붙어있어야 할 방학이라 남편과 아이를 바다에 보내두고 혼자 머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남편은 허용하지 않았다. 주말이라 내려온 것도 아니고 정식 여름휴가인데 가족이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래, 주말 가족이니 함께 할 수 있을 때 함께 해야지. 그것도 바다 물놀이는 아이의 최대 기쁨이니 그 시간에 같이 머물러야지 싶어 느작느작 따라나섰다. 수영복도 입지 않고 노트북과 책을 챙겨서.


수영복 차림으로 집을 나선 남편과 아이는 바다에 도착하자마자 풍덩 뛰어들었다. 머리를 맞대고 물살을 일으키며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습에 몽글거렸다. 게다가 폭염경보 문자가 계속 오고 있는 상황에서 바람 부는 바닷가라니! 휴대용 선풍기도 챙겨갔건만 필요치 않았다. 트렁크에 앉아 바다를 바라만 보고 있으니 잘 따라나섰다 싶었다. 바다에 와서도 혼자 머물고 있으니까. 남편과 아이의 행복한 모습도 놓치지 않으면서 말이다.


멀리서 태풍이 오고 있다지만 바다는 에메랄드빛을 지우지 않았고, 구름은 윤슬을 가리지 못했다. 여전히 아름다운 바다. 작게 크게 물살이 일며 쉼 없이 움직이는 바다는 한없이 보고 있어도 전혀 지겹지 않았다. 이 아름다움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움직임까지 더해지니 책으로 가려던 시선은 계속 바다에 머물렀다. 의미 없이 붙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지금 내 기분을 더 부풀려줄 차가움을 들었다. 맥주 캔이었다.


물놀이도 운전도 남편에게 맡기는 한량 엄마는 거침없이 맥주를 삼켰다. 한 모금이 아닌 연거푸 몇 모금을. 듣는 사람 없어도 단전에서 끌어올린 ‘캬!’는 당연지사. 바다를 보며 시원하고, 바람이 불어 시원하고, 맥주를 마셔 시원하니 언제 집에 있고 싶었냐는 듯 이제는 여기 계속 머무르고 싶을 정도였다. 음료수와 시원함은 비슷하다 하더라도 더 짙은 알싸함이 마음을 간질이고 과하지 않은 아코올이 나를 풀어놓아주기에 자유로운 순간에 더 자유로워질 맥주를 선택하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지 않을까. 바람에 묻어오는 소금기로 피부가 끈적해져도 달달한 끈적임으로 여겨지는 것 역시 맥주의 힘일 터. 결국 바다낮맥은 진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나도 좋고 남편과 아이도 좋은 바다 물놀이는 하루에 그치지 않았다. 남편이 제주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네 번의 바다 물놀이에 나섰고, 수영장 물놀이도 하루를 했으니 무려 5일을 물놀이로 보냈다. 물론 그동안 나는 한 번도 바다에 들어가지 않았다. 남편만 너무 힘들었던 것 아니냐고? 내가 바다에서 혼자 즐긴 만큼 남편도 휴가 중 혼자 1박 2일의 백패킹을 즐겼으니 그걸로 퉁! 치면 되지 않을까. 주말부부가 따로 또 같이 노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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