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와 피아노, 엄마의 선택

워킹맘의 일기

by 여유수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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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서 제일 오래된 물건은 무엇일까. 아마 피아노가 아닐까. 내가 국민학교 1학년이던 1988년의 생일선물이었다. 1988년생 피아노는 2011년생 아이에게도 근사한 악기가 되어준다. 처음에는 나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던 아이가 이제는 자신만의 노래를 만들어 부른다. 계이름을 알게 된 이후 종이에 계이름을 적어오면 나랑 같이 쳐보면서 얼렁뚱땅 가사를 붙여 부르는 것이다. '도파미도레'라고 적어오면 강아지 멍멍하고 부르는 엄마 눈에만 그럴싸한 연주다.


깔깔깔 웃으며 피아노를 치는 아이에게 물었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냐고. 아이는 씩씩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내 마음이 바빠진다. 배우고 싶다고 할 때 배우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긴 것이다. 유치원 종일반에 다니며 아빠 또는 엄마의 퇴근 시간에 맞춰 집에 돌아오는 아이를 가르쳐주겠다는 레슨 선생님은 많지가 않았다. 처음에는 6살 방문 레슨 가능하시냐고 시작했던 질문이 통화가 거듭될수록 평일 저녁 6시 30분 또는 7시에 레슨 가능하시냐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4번째 선생님과의 통화에서야 스케줄을 조정해보겠다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지난 수요일, 피아노 선생님과의 첫 면담이 있었다. 약속 시간은 저녁 7시. 그리고 수요일 아이의 픽업은 내 담당. 정신없이 책상을 정리하고, 허겁지겁 유치원에 도착하니 6시 30분. 약속 시간 전까지 아이를 간단히 씻기고, 밥을 먹이는 일이 남았다. 아이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벗어두고 그림을 그리겠다고 한다. 오늘 유치원에서 본 뮤지컬을 그리고 싶다는 것이다. 평소 같으면 천천히 저녁을 먹자고 그리고 싶으면 그리라고 했을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내 시선은 자꾸만 시계로 향했다.


입이 툭 나온 아이에게 말한다. 기다리던 피아노 선생님이 오시는 날이라 그렇다고. 밥 먹고 선생님 만나고 그때 그리라고. 그림도 그리고 싶었지만 피아노도 배우고 싶은 아이이기에 그림 종이를 식탁에 놓아두고 저녁을 먹는다. 종이를 쳐다보면서 말이다. 밥을 먹고 식탁을 정리하고 나니 6시 55분. 5분의 시간도 아까워 세탁기를 돌린다. 그러자 울리는 벨소리. 선생님과의 면담은 40분 남짓 소요되었다. 선생님이 가시자 마자 아이는 색연필을 잡았고, 그제야 나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이의 옆에 앉은 나는 말한다. 그림 조금만 그리고 목욕해야 한다고. 5분만 더 5분만 더 아이의 부탁을 네 번쯤 들어준 뒤에 나는 무서운 엄마가 되어 아이 목욕을 시켰다.


아이와 목욕을 하면서 시작된 산타클로스 놀이를 조금 더 하다가 번뜩 생각이 난다. 세탁기가 다 돌았겠다는. 빨래를 널기 위해 베란다로 가는 내게 아이는 짜증을 낸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레 놀이가 멈췄기 때문이리라. 아이의 체육복이라며 그래서 널어야 한다며 마음은 설득, 말은 명령을 한다. 설거지도 해야 하지만 그건 내일 아침으로 미룬다. 쫓기던 마음이 조금 잔잔해지자 아이가 자야 할 시간이 되었다. 유치원에서 뮤지컬도 보러 다녀오고, 체육 수업도 했다는 아이는 피곤해서인지 더 놀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아이와 함께 침대에 누었다.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물어보며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평일에 일찍 퇴근해 아이와 놀아줄 수 있는 날은 수요일과 금요일 정도인 엄마. 보통의 수요일이었다면 느긋하게 밥을 먹고, 그림도 실컷 그리고 책도 여러 권 읽으며 깔깔깔 웃었을 시간. 그 시간을 피아노 수업에 양보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아이가 엄마와 함께 놀 수 있는 시간을 이렇게 줄여도 되는 것인지. 본격적인 레슨이 시작되면 수업 시간은 1주일에 하루 그리고 고작 30분. 아마 오늘은 처음이라 그런 것이라고. 익숙해지면 30분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내가 나를 위로하며 아이를 품에 앉는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매 순간 선택을 요구한다. 그리고 엄마는 바란다. 1988년, 내게 노래하는 기쁨을 알려준 피아노가 2011년생 아이에게도 기쁨이 되기를. 지금의 이 선택이 엄마의 욕심이 아니라 아이의 행복을 우선하는 선택이 되기를. 좋은 거야. 잘한 거야.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두 눈과 귀를 가리지 않도록 피아노 레슨을 받는 아이의 모습을 예민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말이다. 거기에 '피아노'보다 '아이'의 마음에 집중해 쫓기는 마음 대신 느긋한 마음으로 수요일 저녁 시간을 채우는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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