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밤, 가로등이 불을 밝힌다. 도로에는 헤드라이트를 밝힌 차들이 쌩쌩 달리지만, 인도는 텅 비었다. 저 멀리 홀로 가로등 빛을 안은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 정장 바지에 버버리를 입고 각이 진 핸드백을 든 차림, 딱딱한 옷과는 어울리지 않게 편안한 운동화를 신었다. 또각또각이 아니라면, 타박타박 박자를 맞춰 딱 떨어지는 걸음을 걸을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둠칫둠칫 엇박을 타며 걷는다. 가만 보니 귀에 이어폰이 꽂혀 있다. 들리는 음악의 박자에 따르는 것일 터. 깊은 밤과 어울리지 않는 경쾌함이다.
무엇인가 계속 어긋나는 그녀에게 시선이 머문다. 옷차림과 어울리지 않는 신발, 보이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걸음걸이, 고요한 밤과 어울리지 않는 노랫소리까지. 귀에 들리는 노래가 발걸음뿐만 아니라 목소리를 타고 밖으로 퍼져 나왔다. 차 소리에 묻힐 줄 알았던 그녀의 목소리는 차 소리 위에 얹혔다.
게다가 그녀는 잠깐이 아닌 제법 오래 걷고 있었다. 여기서 그녀는 바로 나이다. 아마 지나가는 버스 안에서 누군가 나를 바라봤다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분명 술을 많이 마셨고, 술을 깨기 위해 걷고 있는 거라고. 아니면 술자리에서의 흥이 아직 가시지 않아 그 흥을 맘껏 꺼내놓고 있는 거라고. 취하기는 취했는데, 술이 아닌 일에 취한 어느 밤이었다.
점심은 후배가 사다 준 김밥으로 때웠다. 저녁은 아예 먹지 않았다. 딸이 잠들기 전 집에 도착하기 위해서였다. 9시에 침대에 누워 9시 30분이면 잠드는 아이를 만나기 위해 아무리 늦어도 회사에서는 8시 30분에 출발해야 했다. 회사에서 집까지는 1시간 거리였다. 하지만 어김없이 실패했다. 끼니도 제대로 못 챙기며 서둘렀지만, 밤 9시에도 나는 여전히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일이 끝나지 않아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밥이라도 제대로 먹고 일할걸’
밤 10시가 되어서야 컴퓨터를 끌 수 있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지만 반짝이는 네온사인의 가게들은 밤손님이 아닌 술 손님만 부르고 있었다. 무엇을 먹을지, 어디서 먹을지조차 고민하기에 지쳐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다행히 버스에는 빈자리가 있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다른 사람들의 대화 소리를 차단한 채 나만의 세계에 파묻혔다.
‘왜 스무 명에 가까운 부서원 중 나만 홀로 사무실에 남아 야근해야 하는 걸까.’
‘왜 아이가 잠든 모습만 봐야 하는 걸까.’
‘왜 나도 일하고 남편도 일하는데, 나만 죄인이 되어 집에 들어가야 하는 걸까.’
우울한 생각을 불러들이는 진한 발라드를 탓하며 힙합으로 선곡을 바꿨다. 음악이 경쾌해졌다고 해서 생각의 흐름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왜 내게만 일이 쏟아지는 걸까.’
‘왜 나는 못 하겠다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걸까.’
‘왜 나는 무리한 일정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걸까.’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답답한 마음은 내 안에서 요동치며 울컥 쏟아질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버스 기사가 급브레이크라도 밟으면 때가 이때다 싶어 소리를 칠 기세였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어깨에 걸린 가방이 버스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거리자 그 가방을 째려봤다. 살짝이라도 나를 건드리면 톡 쏘아붙일 심산이었다.
‘나 좀 기다려 주면 안 돼? 수고했다고 좀 해주면 안 돼? 왜 자고 있는 건데!’
‘저녁 먹은 설거지는 누가 하라고.’
‘정리는 내 몫이야? 장난감은 왜 저리 널브러져 있는 건데’
날카로운 눈길 끝, 앞에 선 승객 대신 남편이 보였다. 브레이크와 함께 몸이 세게 앞뒤로 움직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내가 야근하는 동안 집에서 아이와 씨름했을 남편이 괜한 봉변을 당할 것 같았다. 내려야 하는 정류장 보다 두 정류장 앞서 버스에서 내렸다. 내 안에 쌓인 화를 비워내는데 걷기만 한 처방이 없으니까.
깜깜한 밤거리에 발을 내디뎠다. 아무도 없는 길이 무서울 법도 하건만 무섭다는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들리는 음악에 몸을 맡기며 걸을 뿐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굳었던 얼굴이 점점 말랑해졌다. 화로 꽉 들어차 답답했던 마음에 상쾌한 밤바람이 일었다. 발바닥은 뜨거워진 반면 머리의 열기는 가셨다. 지끈거림이 멈췄다. 묵직했던 발이 가볍게 들어 올려졌다. 어긋나던 몸과 마음의 균형이 제 자리를 찾은 기분. 플레이리스트는 한 바퀴를 돌아 다시 같은 음악인데 날카롭던 힙합의 비트들이 펑키하게 들리는 건 달라진 기분 탓일 거다.
물론 내일도 야근할지 모르고, 내일도 두 정거장 전에 내려 이렇게 걸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오늘 밤만큼은 뒤척임 대신 편히 잘 수 있을 테니 우선 그것으로 만족했다. 이렇게 조금씩 쏟아내다 보면 언젠가 나도 제대로 말할 수 있겠지. 이 일정은 무리고, 업무는 이미 적정량을 넘었다고. 나도 정시에 퇴근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내 두 발바닥이 더 딱딱해지는 날, 내 마음도 더 굳세져서 해야 할 말은 하고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더는 가로등이 불 밝힌 길을 일에 취해 걷고 싶지 않았다. 내려야 할 정류장에 내려 딱 10분, 햇빛 남은 그 길을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낼 거라는 기대에 취해 걷고 싶었다.
제목의 사진은 Pixabay의 cs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