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껏 걸어야!

by 여유수집가

“ㅈㅅ ㄱㄱ?”

“ㅇㅇ”


날씨가 좋은 날에는 메신저 창에 암호 같은 글자가 떴다. 회사 지하 식당을 줄여 ‘지식’으로 부르고 이것도 쓰기 귀찮아 ‘ㅈㅅ ’으로, 가서 먹자는 말을 ‘고고’로 표현하며 ‘ㄱㄱ’으로 쓴 것이었다. 질문에 대한 답 역시 ‘응응’을 ‘ㅇㅇ’으로 썼다.


사실 점심시간에 지하 식당을 가는 일은 드물었다. 야근할 때 저녁 식사를 주로 지하 식당에서 먹다 보니 아무리 메뉴가 달라도 하루 두 끼를 모두 지하 식당에서 먹기는 질리기도 하고, 계속 건물 안에 머무는 것이 싫기도 하고, 더치페이보다는 사주고 얻어먹는 사내 문화가 있어 주로 외식을 했다. 하지만 날씨가 화창하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음식의 맛보다는 음식을 빨리 먹는 것이 중요했다. 메뉴를 고민하는 시간과 음식을 주문하고 나오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을 줄여 산책하는데 시간을 보탰다.


sandi-benedicta-wNWxhHjdl6Q-unsplash.jpg Unsplash의 Sandi Benedicta

15년의 회사 생활 동안 나는 8년 남짓을 을지로입구역에서 근무했는데, 이곳은 근무지로 최고의 장소였다. 도보 10분 거리 안에 덕수궁, 청계천, 서점, 백화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날의 점심 산책은 청계천. 한낮에 청계천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은 비슷했다. 정장바지나 청바지, 면바지 등 하의의 형태는 다르더라도 상의에는 모두 카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 카라 위에는 사원증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회사원들이었다. 그들은 느릿느릿 걸어도 될 풍경에서 또각또각, 따박따박 바쁜 도시의 속도를 유지했다. 비슷한 속도만큼이나 들려오는 이야기도 비슷했다. 답답한 상황에 대한 토로가 대부분이었다.


“어제도 야근했어?”

“야, 퇴근 30분 전에 보고서 수정하라고 하고 내일 아침에 보자 그러면 당연한 거 아니냐!”

“종일 회의만 하면 대체 일은 언제 하냐?”

“서로 일 떠넘기느라 결론도 제대로 안 나고. 속 터져.”


생각이 사무실에 갇혀 있기에 걸음 역시 사무실에서의 속도를 따랐지만, 표정은 달랐다. 미간을 찌푸리고 해야 할 이야기임에도 슬며시 감도는 미소는 숨겨지지 않았다. 형광등 조명이 아닌 자연광 아래 광합성을 하고, 글과 숫자의 빽빽함 대신 탁 트인 하늘을 향해 시선을 열고, 실수하지 않을까 곤두선 긴장을 잔잔하게 흘러가는 물에 흘려보내며 생긴 표정이었다. 처음 청계천을 들어설 때는 묵직했던 걸음이 다시 청계천을 나설 때는 가벼워졌다. 그리고 그 가벼워진 마음은 생각 회로의 속도를 높여 나른한 오후가 아닌 산뜻한 오후를 만들어줬다.


1200px-Deoksugung-jeonggwanheon.jpg Wikimedia Commons의 Kimhs5400(블루시티)

짜증이 넘치고 넘치는 어떤 날에는 혼자서 걷는 것을 택했다. 청계천보다는 사람이 조금 더 적은 덕수궁으로 갔다. 비록 천 원의 입장료가 들었지만, 순식간에 현재를 차단하고 조선 시대로 가는 입장료로는 아주 저렴했다. 딴 세상에 들어서면 현실에서 쌓인 스트레스와도 잠시지만 이별할 수 있었다. 덕수궁을 한 바퀴 돌고 제일 좋아하는 장소인 ‘정관헌’ 앞에 섰다. 고종이 커피를 즐겨 마셨다는 전각이었다. 덕수궁이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와 ‘조용히 바라보다’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현실의 내 문제를 잠시 잊고 저 안에서 커피를 마시며 밖을 내다봤을 고종을 떠올렸다. 가만히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내 마음도 고요해졌다.


드르르르르르 주머니에서 요란하게 진동이 울렸다. 사무실 번호였다.


“여보세요.”

“너 어디야? 왜 안 와? 부장님이 찾은 지 꽤 됐어.”


시간을 보니 점심시간이 끝난 지 30분이 지나있었다. 점심도 안 먹고 나선 길이라 충분히 여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패착이었다. 처음에는 양치하러 화장실에 갔거니 하고 기다렸는데 기다려도 오지 않아 전화했다고 선배는 말했다. 세 번쯤 부장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고. 오전에 신나게 깨졌는데 또 깨질 일이 남았을까. 늦었다고 더 깨지는 것은 아닐까. 느릿느릿 걷던 발에 모터를 달아 우사인 볼트를 희망하며 뛰었다.


몸을 확 낮춰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 조심스레 사무실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으니 책상 위에는 빨간펜으로 난도질된 보고서가 올려져 있었다. 고개를 살며시 들어 부장님 책상을 바라보니 부장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휴…. 그때 깜빡이는 메신저. ‘부장님 회의 가셨음.’ 나와 통화를 한 뒤 선배는 부장님께 내가 잠깐 다른 부서에 갔다고 둘러댔고, 기다리다 못한 부장님께서는 빨간펜을 드신 것이다.


일찍 들어왔어야 했다. 급한 마음, 짜증 나는 마음이 복합적으로 담긴 빨간펜은 마구 휘갈겨져 아무 글씨도 알아볼 수 없었다. 있는 눈치 없는 눈치 총동원했지만, 결국 야근해야 했다. 점심시간 산책이 오후 업무 능률을 올린다고 했던가. 그건 적당했을 때의 이야기. 과한 욕심은 결국 업무 능률을 망치고 내 저녁 시간까지 망치고 말았다.


야근하며 당연히 또 열받은 나는 결국 퇴근길 버스 두 정류장 전에 내려 집까지 걸어갔다. 다른 날이면 두 정류장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풀렸을 마음인데, 이날은 앙금이 남아 있었다. 아파트 단지를 몇 바퀴 더 돌아야 했다. 그래도 짜증은 남아 집에 들어서자마자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괜히 걷기만 더 걸어 아픈 종아리를 주무르면서.


걷기가 스트레스를 없애준다고 믿었는데, 이날만큼은 아니었다. 도를 넘은 걷기가 내 오후를, 저녁을 그리고 몸을 망쳤다. 너무 피곤해 오히려 잠을 설치고 말았으니까. 아무리 좋은 것도 적당해야 좋은 것임을 다시 또 배운다. 그럼 걷기의 적당선은 어디일까. 스트레스에는 적당선이 없는데 말이다.





제목의 사진은 Pixabay의 mimi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