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잣말의 세계

by 여유수집가

입사 4년 만에 대리가 됐다. 제때 한 승격임에도 나는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초짜 취급에서 벗어나게 됐으니 이제는 덜 무시당하리라!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어깨를 힘주어 폈다.


당시 나는 계약 심사 업무를 맡고 있었다. 영업부서에서 체결하려는 계약의 위험 요소를 평가해 비용을 산출하거나 계약 조건을 조정하는 역할이었다. 최대한 많은 계약을 체결해야 하는 영업부서와 최대한 안정적으로 계약을 인수해야 하는 심사부서의 차이로 인해 두 부서는 의견이 다른 경우가 잦았다.


“민 주임, 왜 이 조건으로는 안 돼?”

“과장님, 위험도가 너무 높아서 그래서요. 제가 수정한 대로 조건을 조정해주셔야 해요.”

“이거 진짜 중요한 계약이야. 조정 없이 정말 안 될까? 안 되겠다. 김 과장님 자리에 계셔?”


주임은 그랬다. 꼼꼼하게 살피고 정확하게 판단해서 업무를 처리해도 경험 부족으로 융통성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식견이 좁아 규정을 단어 그대로만 해석할 뿐 행간의 의미를 읽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안 된다’라고 말하는 상황에서 이야기는 종결되지 못하고 윗선을 찾아 올라갔다.


내가 돌린 전화벨이 과장님 자리에서 울렸다. 과장님 목소리를 향해 귀가 쫑긋 섰다. 내가 안 된다고 넘긴 이야기가 나와 같은 결말로 끝날지, 나와 다른 결말을 맞게 될지 조마조마했다. 매번 나와 같은 결말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와 다른 결말인 경우도 많았다. 나와 같은 결말일 때는 내가 맞는데 왜 내 말은 안 믿어주는지 자존심이 상해 기분이 나빴고, 나와 다른 결말일 때는 왜 과장님 같은 생각을 나는 하지 못했는지 내 능력이 아쉬워 속이 상했다.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걷는 길,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정지시켰다. 계속 마음에 남았던 낮의 통화를 매듭짓고 싶어서였다. 시작은 영업부서의 메신저였다. 인사도 없이 ‘왜 안 되는 거지?’가 첫마디였다. 차근차근 이유를 설명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영업부서 과장님은 전화에서도 인사도 없이 왜 이 계약이 이 조건대로 체결되어야 하는지만 말했다. 결국 전화는 내 윗선 과장님께로 돌려졌는데, 과장님은 내 기대와는 다르게 ‘된다’로 결론을 바꿔버리셨다.


다시 메신저가 깜박였다. 조금 전 나와 통화를 했던 그 영업부서 과장님이었다. 전화를 달라고 했고, 나는 예감이 썩 좋지 않은 채로 전화를 걸었다. 과장님 딴에는 나를 가르치시겠다는 의도였겠지만, 영업부서에서 얼마나 계약을 어렵게 받아오는지 아느냐에서 시작해 책상 앞에만 앉아 있다 보니 현장 경험이 없어서 쉽게 판단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일방적인 말이 귀를 때렸다. 영업에서 고생하시는 것 충분히 안다고, 나도 현장 경험 있다고 따박따박 대꾸하고 싶었지만 이미 결론 난 이야기에 더는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아 죄송하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priyash-vasava-x3klySvlVzg-unsplash.jpg Unsplash의 Priyash Vasava

전화는 끊었지만, 마음은 끊어지지 않았다. 이 기분 이대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아서 퇴근길에 다시 그 전화를 불렀다. 아무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는 이어폰을 그대로 낀 채 마이크는 입 근처에 뒀다. 그리고 가상통화를 시작했다. 낮에는 꾸역꾸역 삼켰던 말들을 입 밖으로 꺼냈다.


상대방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를 상상하며 통화를 이어갔다. 가짜 통화라고 속삭이듯 말하거나 나긋나긋하게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진짜 통화로 생각할 텐데 온 마음과 감정을 담아 말을 뱉었다. 못다 한 말을 이렇게라도 꺼내놓으니 속이 다 시원했다.


퇴근길 혼잣말의 세계가 열렸다. 동료들의 귀가 여기저기 열려있는 사무실 근처, 사람 빽빽한 지하철에서는 시도하지 못했지만,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걷는 동안은 괜찮았다. 낼 수 있는 만큼 화를 내며 쿵쿵 걷기도 하고, 어이없는 상황에서는 발걸음을 멈추기도 하며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눈치 보지 않고 표출했다.


처음에는 쌓인 말을 꺼내기 위해서였지만, 혼잣말은 점점 그 영역을 넓혔다. 실수한 날은 실수하기 전으로 돌아가 실수 없이 상황을 마무리하는 혼잣말을 했고, 설명을 버벅거려 쪽팔렸던 날은 설명을 매끈하게 하는 혼잣말을 했다.


민 대리가 되었기 때문인지, 내 업무역량이 향상됐기 때문인지 내 윗선을 찾는 연락은 점점 줄어들었지만, 혼잣말은 줄지 않았다. 후회를 잊기 위해 했던 혼잣말에 후회를 만들지 않기 위한 혼잣말이 더해졌다. 내일 해야 할 계약 조건 조정 안내를 연습하며 걸었고, 며칠 앞으로 다가온 중요한 PT를 연습하며 걸었다. 화내고 한탄하기 일쑤였던 가상통화 속의 나는 점점 정확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으로 달라졌다. 뒤만 보던 민 주임은 그렇게 점점 앞을 볼 줄 아는 민 대리가 되어갔다.





제목의 사진은 Unsplash의 Quino Al

이전 08화낯선 아저씨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