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 살, 집은 신촌이고 사무실은 충정로에 있었다. 집에서 충정로까지는 걸어서 50분. 춥거나 비가 오는 날씨만 아니라면 뾰족구두를 운동화로 갈아 신고 곧잘 걸어서 퇴근했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걸었다. 운동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걷는 것이 좋아서이기도 했다. 160cm가 채 되지 않는 작은 키의 짧은 다리로는 도저히 빨리 걸을 수가 없었다. 그 느린 속도의 세상에서는 참 많은 것이 보였다. 가게 앞이 얼마나 깨끗한지를 보며 주인의 부지런함을 짐작했고, 가게 문밖으로 줄을 선 사람들을 보며 가게의 인기를 알아챘다. 가게에 걸려 있는 옷과 가게 앞에 나와 있는 물건을 보며 유행을 알 수 있었고, 나를 지나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 서울이 아닌 스페인의 세비야에서도 그랬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운동화를 신고 걸었다. 차 한 대가 버겁게 지나갈 수 있는 골목길을 걸으며 정보 센터에서 받은 지도를 가방에 넣었다. 히랄다탑과 까테드랄이 목적지였지만 먼저 이곳의 삶을 느끼고 싶었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니 오렌지 나무 가로수길이 나왔다. 한겨울에도 볼 수 있는 진한 초록빛, 그리고 그 안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주황빛 오렌지가 눈길을 붙잡았다. 그 주황빛은 내 얼굴에 미소를 물들였고, 바람에 배어나는 상큼한 향은 콧노래를 불러왔다. 여기에 12월이라 챙겨 입은 패딩점퍼를 벗기는 따뜻한 햇볕은 마음을 간질였다. 여행자인 나만 이렇게 팔랑이는 것일까. 아니었다. 장바구니를 들고 걷는 사람도,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도, 정장을 차려 입고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도 눈이 마주치면 다정하게 미소를 건넸다. 도시에 온기가 묻어났다.
걷고 또 걷다 보니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됐다. 많이 걸은 만큼 배도 고팠다. 유난히 소란스러운 식당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목소리도 우렁차고 몸놀림도 씩씩한 중년의 여인이 나를 반겼다. 자리에 앉고 보니 동양인은 나 혼자였다. 내 테이블, 네 테이블 할 것 없이 모두 큰 소리로 웃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니 이 가게에 단골이 아닌 사람 역시 나 혼자뿐인 것 같았다. 테이블의 경계가 사라진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갔을 때 들렀던 한 가게가 떠올랐다. 아빠를 보자마자 가게의 모든 손님은 아빠를 알아봤고, 나와 동생은 가게의 모든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인사를 해야 했다. 그리고 손님들은 맛있다며 내게 자신들이 시킨 음식을 건넸다. 가게 안 모든 손님이 하나가 되어 어울렸던 그 시골 읍내 식당을 스페인에서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이곳 역시 손님 모두 하나가 되는데 나를 포함시켰다. 알아듣지 못하는 스페인어로 내게 자꾸 말을 걸었다. 못 알아들으면 고개를 돌릴 법도 하건만 온갖 몸짓을 했다. 내게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왠지 저 많은 말 중 '어느 나라에서 왔니?'가 하나는 섞여 있을 것 같아 무작정 대답했다.
"I'm from Korea. Korea.... Corea!"
"Ah, Corea!"
"Corea?"
"Corea!"
"Corea!"
"Corea!"
유일하게 통한 말, '코레아'. 가게 안이 '코레아' 메들리로 가득 찼다.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오랜 고민 끝에 고른 오렌지 소스 오리고기 주문을 위해서였다.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부르자 모두의 시선이 다시 내게 모였다. 벌게진 얼굴로 입도 뻥긋 못하고 메뉴판에 손가락을 이용해 주문을 마쳤다. 이제는 각자의 테이블로 시선이 흩어질 줄 알았지만, 종업원은 굳이 큰 목소리로 내가 주문한 요리의 이름을 가게 안에 외쳤다. 찰떡같이 알아서 내가 이 가게의 대표 요리를 시켰을까. 어떤 사람은 손뼉을 치고, 어떤 사람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손님들의 반응과 내 입의 반응은 달랐다. 스페인에 와 처음으로 이 음식은 내 입에 맞지 않았다. 포크로 오리고기를 깨작깨작 해체만 하고 있음을 들켰는지 그날 나는 그 가게에 파는 거의 모든 메뉴를 한 입씩 먹어볼 수 있었다. 포크를 달라고 하더니 음식을 직접 찍어 주는 사람, 작은 접시에 음식을 덜어서 건네주는 사람, 나를 손짓으로 불러 한입 먹으라고 하는 사람, 급기야 종업원까지 접시에 음식을 조금씩 담아서 내게로 가져다주었다. 물론 내가 시킨 샹그리아 외에 까바도 마셔볼 수 있었고.
배가 터질 것 같아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Por favor, recibo."
정확한 표현인지 자신은 없었지만 여행 책자에서 보고 외웠던 기억을 더듬어 '영수증 주세요'를 말했다. 다시 종업원이 가게 안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손님들도 다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아무래도 내가 스페인어를 썼다고 알려준 모양이다. 계산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사람들은 내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많은 시선들이 부담스러었지만, 그들의 입꼬리가 모두 올라가 있어 내 입꼬리도 따라 올라갔다. 그리고 그들의 분위기에 전염되어 나는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Adios!"
다들 내 말을 따라 말하며 함께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 역시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보이며.
길을 걷다 우연히 들어간 가게였다. 왁자지껄한 사람들이 보였고, 호탕한 웃음소리들이 들렸고, 향긋한 음식 냄새가 나를 그 가게로 이끌었다. 덥석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두세 번 가게 앞을 왔다 갔다 했다. 동네 사람들로 가득해 보이는 가게에서 이방인으로 문전박대당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다른 가게를 갈까도 생각했지만, 유독 그 가게에 마음이 끌렸다. 그러다 가게 안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고 그는 내게 미소를 건넸다. 그리고 그 미소 덕분에 나는 천천히 문을 열고 그 가게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내 걸음의 느린 속도 안에서 나는 멋진 가게와 귀한 미소를 발견했고, 다정한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어갈 수 있었다. 찬찬히 살폈기에 누릴 수 있었던 시간이었고, 천천히 걸었기에 가질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세비야 사진 by lucidjudge in 2008
건배 사진 by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