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 좀 먹은 날

by 여유수집가

“XX, 니들 맘대로 그렇게 판단하는 게 어딨어?”

“저희 마음대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 판례를 참조해서 판단했고요.”

“야, 이 XXX야! 말이 안 되잖아. 말이.”


법과 규정에 따라 처리했을 뿐인데 고객은 내게 소리를 지르며 욕을 했다. 따박따박 대꾸하고 싶었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꾹 삼켰다. 반박했다가 고객이 상위 기관에 민원이라도 넣으면 결국 불이익을 받는 것은 나이기에 이면지 위에 수십 개의 동그라미를 그리며 참을 뿐이었다.


“XX”


전화기를 쾅 내려놓으며 내 입에서는 자연스레 욕이 튀어나왔다. 10분 넘게 수화기를 통해 들었던 말의 복기였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욕을 들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스물다섯, 일의 처리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고객과 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듣기만 하다가 입 밖으로 욕을 꺼내고 나서야 주변을 둘러봤다. 선배들의 시선이 잠깐 내게 모였다가 흩어졌다. 그렇게 해도 전화기는 안 부서진다는 한 선배의 말만 공중에 남았다. 내가 뱉은 욕은 쾅 내려친 전화기 소리에 묻혔으리라 믿었다.


툭. 옆자리 선배가 어깨를 쳤다. 나가자고 했다. 나른한 오후면 곧잘 함께 커피를 마시던 사이였기에 평소와 다름없이 선배를 따라 나갔다. 사무실 근처 커피숍이나 사무실 뒤편 벤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곤 했는데 이날 따라 선배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좀 걷자고 했다.


“좀 더 시원하게 하지 그랬어.”

“네?”

“XX! 말이야.”


dmitrii-ivashko-UtEwFVeUMBs-unsplash.jpg Unsplash의 Dmitrii Ivashko

선배가 거침없이 욕을 뱉었다. 깜짝 놀라 주변을 돌아봤다. 다행히 오피스 밀집 지역의 오후 뒷골목은 한적했기에 선배의 욕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욕한 것이 들켜 부끄러웠다. 선배에게 해명하고자 입을 여는데 선배가 선수를 친다.


“욕할 만했겠지 뭐. 날도 좋은데 복잡한 생각은 넣어두고 그냥 좀 걷자.”


선배와 아무 말 없이 걸었다. 나란히 걷다가 골목이 좁아져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앞에, 선배는 뒤에 걷게 됐다. 복잡한 생각은 넣어두자 했지만 넣어지지 않았다. 상대가 욕을 하더라도 고객이라면 무조건 참아야 하는지, 법과 규정, 상식에 맞게 설명했는데 왜 고객은 억지를 부리는지, 고객에게는 내가 화풀이 대상이 된다지만 나는 누구에게 화를 풀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이해해 보려 애썼다.


툭. 선배는 다시 내 어깨를 치며 내 옆에 나란히 섰다.


“아무리 생각이 많다고 이렇게 천천히 걷기냐!”


평소 10분이면 충분한 거리를 20분 가까이 걷고 있었다.


“좀 풀렸지?”

“네?”

“뒤에서 보니 어깨랑 팔에 힘이 좀 빠졌길래. 담아두지 말고, 잊을 건 빨리 잊는 게 최고다.”


욕 한마디로 모든 상황을 알아채고, 걷는 모습만으로 마음을 읽어내는 선배가 놀라웠다. 자신이 알아챈 것을 지나치지 않고 살펴주는 선배가 고마웠다. 회사 생활을 얼마나 더 해야 선배와 같은 혜안을 가질 수 있을지, 회사 생활에 얼마나 더 내공이 쌓여야 동료를 위로할 수 있을지 그 시간이 까마득하게 여겨졌다.


좁은 골목을 벗어나 대로로 나서자 선배는 걷는 속도를 높였다. 사무실로 돌아가려 서두르는 것은 아니었다. 빙 돌아가는 길로 향하며 선배는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줬다. 욕을 듣고 또 들었던 사연이었다. 열받고 짜증 나는 리얼리티 다큐를 코믹으로 만드는 선배의 말솜씨에 속상한 마음과는 달리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웃음이 터져 나왔다.


steve-johnson-Kr8Tc8Rugdk-unsplash.jpg Unsplash의 Steve Johnson

내 속도대로 느리게 걸으며 분해서 들끓던 마음은 조금씩 가라앉았고, 선배의 속도대로 빨리 걸으며 억울한 상황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보게 됐다. 다시 사무실. 자리에 앉으며 쾅 하고 내리친 전화기를 바라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를 향한 욕이 아니라고, 세상을 향한 욕이었다고. 그러니 한 발 떨어져 들으라고. 그 욕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진정한 승자가 되는 길이라고. 욕을 들으며 그린 수십 개의 동그라미로 빽빽한 이면지를 잘게 찢어 휴지통에 버렸다. 내게 남은 욕 찌끄레기까지 함께.





제목의 사진은 Unsplash의 Julian Hochge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