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의 민낯을 알고 싶다면 운전하는 모습을 보거나 술 마시는 모습을 살피라고 했다. 갑자기 차가 끼어들 때 과도하게 흥분하지는 않는지, 난폭 운전이나 보복 운전을 하지는 않는지, 가다 서다 하는 길에서 줄곧 짜증만 내지는 않는지 등등. 술 역시 자제력이 있는지, 술버릇은 어떤지를 살펴보라고 한다. 여기에 나는 한 가지를 덧붙인다. 나란히 걸어보기. 상대방과 속도를 맞추며 걷는지, 앞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옆도 둘러보며 걷는지를 살핀다.
대학 동기들과 창경궁으로 나들이를 하러 갔던 날. 살랑이는 바람이 좋고, 바람 따라 날리는 나뭇잎 소리가 좋아 무리에서 떨어져 부러 천천히 걷고 있는데 유독 한 동기가 나와 속도를 맞췄다. 멈춰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같이 멈췄고, 연못 속 물고기를 들여다보느라 고개를 쭉 내밀면 같이 고개를 내밀었다.
“니들 둘이 뭐 해?”
“영화 찍냐?”
동기들의 놀림에 신경이 살짝 거슬렸는데 나와 나란히 걷던 녀석이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멋대가리도 없는 것들. 그렇게 빨리 걸으면 제대로 느낄 수나 있냐!”
멋이 없어 우르르 몰려가는 무리와 멋이 있어 느릿느릿 걸어가는 나와 녀석. 걸으면서 ‘멋’을 찾는 녀석이 좋았다. 그리고 얼마 뒤 창덕궁으로 나들이를 나섰을 때는 멋없는 무리는 다 떼어놓고 녀석과 단둘이 궁을 걸었다. 녀석이 처음으로 달리 보였던 창경궁, 녀석과 동기 말고 다른 사이가 되고 싶어 졌던 창덕궁. 걸으면서 마음을 키웠던 녀석과 내가 연인이 된 뒤 제일 좋아했던 데이트 코스 역시 걸어야만 하는 낙산공원이었다.
수업이 끝난 오후 6시, 학교 후문 근처 백반집에서 저녁을 먹고 이제 막 활기를 띠기 시작한 대학로로 향했다. 화려하고 분주한 분위기에 휩쓸려 마음은 들떴고 목소리는 높아졌다. 하지만 우리의 발걸음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고 조금 더 안쪽을 향했다.
분위기가 달라졌다. 손님을 부르는 화려한 조명은 가족을 기다리는 따뜻한 조명으로 바뀌고 들썩이는 사람들의 분주함은 휴식을 찾아 돌아오는 사람들의 편안함으로 바뀌었다. 아파트 즐비한 서울에서 단층집과 이 층 양옥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네가 나타났다. 오래된 세탁소와 이발소에 정겨움은 더 커졌다. 우리는 길모퉁이 작은 슈퍼로 들어가 캔맥주와 과자를 샀다. 데이트 날, 저녁을 늘상 먹는 백반으로 먹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오늘의 메인 식사는 백반집의 백반이 아니라 낙산공원의 야외 맥주이기 때문이었다.
검은 봉지를 달랑달랑 들고 낙산공원으로 향했다. 제법 경사도 있고 계단도 많아 구두보다 운동화가 제격. 그다지 꾸미는 것에는 소질이 없어 청바지에 티셔츠 그리고 운동화면 충분한 우리에게 어울리는 길이었다. 걷는 중간중간 시간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막판에 급히 올라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맞이하기는 싫은 일몰이었기에 적당히 속도를 조절하며 걷었다.
성곽 앞에 섰다. 파랗던 하늘에 점점 붉은색이 스몄다. 내게서 한참 떨어진 저 먼 하늘부터 붉어졌다. 올라오느라 고생했다며 숨 고를 시간을 주는 하늘의 배려였다. 해는 점점 내려가고 하늘은 점점 붉어지는데, 아직 불빛을 밝히기 전인 저 아래 빼곡한 도시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잠시 멈춰 숨을 골랐다.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끼고 음악을 들었다.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힘으로 꽉 잡은 두 손. 그 손으로 서로를 향한 같은 마음을 흘려보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들면 도시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줬다. 빼곡하던 건물들이 반짝이는 보석이 됐다. 더는 삭막하지 않은 도시. 이 도시에서 우리는 어떤 불빛으로 존재하게 될지. 이제는 음악 대신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검은 봉지를 열었다. 맥주를 마실 시간이었다. 서울을 발아래 두고 마시는 맥주는 얼마나 맛있는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 과자를 두 봉지 사가기는 했지만 과자는 빵빵한 상태 그대로 검은 봉지 안에 남겨졌다. 바람에 살랑살랑 날리는 머리카락에 마음도 살랑거려 맥주를 마시는 속도는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과자를 먹을 겨를이 없었다.
평일 밤 낙산공원은 인적이 드물었다. 게다가 성곽길도 꽤 길어 조금만 더 올라가면 있던 인적도 사라졌다. 함께 노을을 보고, 밤하늘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신 커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 으슥한 곳을 찾아 진한 키스를 하고 난 뒤 우리는 낙산공원을 내려왔다. 올라갈 때 따뜻했던 손은 뜨거워져 있었고 올라갈 때 경쾌했던 말소리는 수줍음에 가려 미소만 남겨졌다. 다시 정겨운 동네를 지나 화려한 대학로로 들어서면 쿵쾅거리던 심장 소리는 제 박동을 찾았고, 미소만 남겨졌던 자리에는 다정한 말들이 채워졌다.
낙산공원을 올라갔다 왔을 뿐인데 서로를 향한 마음이 더 단단해진 듯했다. 이건 모두 다 걸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다른 보폭을 하나의 보폭으로 맞추고, 서로를 향해 고개를 올리고 내려 가장 가까이에서 말을 건네고, 시선을 맞춰 마음을 들여다보고, 꽉 잡은 손에서 마음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었던 시간. 무엇보다 오르막 내리막길에서 빨라진 심장박동은 설렘 지수를 높여 애정 지수까지 높였으니 이보다 더 좋은 데이트가 어디에 있으랴. 연애할 때도 아무튼 걸어야 한다.
제목의 사진은 Wikimedia Commons의 KO BYUNGS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