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살이의 만병통치약

by 여유수집가

나는 지방 소도시에서 성장했다. 집은 개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택지지구에 자리한 아파트. 네모반듯하게 조성된 택지지구의 동선은 무척 단순했다. 고등학교는 동네를 벗어나 구도심에 있는 곳으로 다녔는데, 아파트 정문에서 학교 정문까지 사설 봉고차를 타고 오갔다. 학교와 집을 빼고 고등학생이 찾아가는 곳은 뻔했다. 분식집, 서점, 레코드 샵, 팬시점, 문구점. 그리고 이 모든 곳은 학교 반경 도보 10분 거리 내에 있었다. 단순한 동선으로 채워지는 삶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눈 감으면 코 베어 먹을 서울이라는데 괜찮겠냐는 친구들의 걱정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큰아빠, 작은아빠, 큰외삼촌, 작은외삼촌, 두 명의 고모, 두 명의 이모. 서울에 사는 친척이 몇 명인 줄 아냐며 방학 때마다 놀러 갔던 것 잊었냐며 의기양양했다. 하지만 놀러 온 것과 살러 온 것은 달랐다. 놀러 왔을 때는 동행이 있었고, 동행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 됐지만, 살러 오니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스스로 길을 찾아야 했다.


대학 선배들은 지하철 노선도만 잘 보면 된다고 일러줬다. 지방 소녀티 안 내기에 지하철은 만병통치약이라고 했다. 거미줄처럼 연결된 지하철은 내가 가고 싶은 곳 어디든 데려다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만병통치약이 소용없는 사람도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나였다. 사람들도 가득 찬 지하철에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온갖 냄새가 코를 자극해 지하철만 타면 숨쉬기가 어려웠다. 분명 오른쪽에서 탔는데 왼쪽으로 내려야 할 때면 사람들을 밀치고 이동해야 했지만,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사람들 사이로 도무지 어깨를 들이밀 수 없었다.


집은 학교 후문 근처. 집과 학교만 오간다면 복잡할 것 없는 동선이었지만, 스무 살의 대학생이 어찌 학교와 집만 오갈 수 있으리오. 다른 대학에 진학한 고등학교 친구도 만나러 가야 했고, 고등학교 3년 내내 동경했던 신촌, 홍대, 강남 등의 핫 플레이스도 가봐야 했다. 지하철이 안 되면 버스를 다면 되지! 버스도 쉽지 않았다. 한 정류장에 서는 버스 종류가 왜 그리 많은지. 노선은 왜 그리 복잡한지.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것도 여러 번. 분명 꼼꼼하게 노선을 확인했음에도 애먼 정류장에 내리는 것도 여러 번이었다. 멍청하다는 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거의 없었는데 서울에서는 멍청이가 돼버린 것 같았다.


택시 탈 돈이 없는 가난한 대학생에게 남은 방법은 걷기였다. 학교에서 먼 신촌, 홍대, 강남은 미뤄두고 학교에서 가까운 대학로, 종로, 인사동부터 두 발로 익히기로 했다. 집에서 대학로까지는 걸어서 20분, 인사동까지는 30분, 종로까지는 50분이니 모두 걷기에 무리는 아니었다. 특히 가까운 대학로를 자주 찾았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기 위해서도 찾았지만, 영화나 연극을 보기 위해서도 찾았다.


특히 예술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동숭시네마텍은 나만의 아지트였다. 오전 수업이 없는 날이면 당연하듯 가서 조조 영화를 봤다. 예술영화를 조조로 본다는 것은 극장의 유일한 관객이 된다는 의미와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많은 영화를 혼자서 보는 특혜도 누릴 수 있었다. 영화를 보러 가는 날에는 영화 시작 시각보다 20~30분 정도 여유를 두고 집을 나섰다. 밤의 화려한 파티를 끝내고 고이 잠든 대학로를 두 발로 다독이는 느낌이 좋았고, 사람이 사라진 쓸쓸한 길에 다시 사람의 온기를 불어넣는 것도 좋아 일부러 빙 돌아 극장으로 향했다.


동기, 선배들은 유별나다고 했다. 지하철에서 사람 많은 것 정도는 좀 참으면 되는데 그걸 못 한다고 타박했고, 버스도 헷갈리면 특정 노선 한두 개만 정해서 타다 보면 익숙해질 텐데 그조차 안 한다고 구박했다. 걷는 게 더 힘들고 귀찮은데 괜한 고집을 부린다며 답답해했다. 처음에는 지하철에 사람이 많고 버스가 복잡해서 걷기 시작했지만, 걷다 보니 걷는 게 좋아서 그러는 거라고 진심을 말해도 핑계라며 일축했다. 하지만 이들의 타박과 구박을 멈추게 하는 사건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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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학교 앞에서 술을 마시다가 조금 지겹다 싶으면 대학로로 나가 술을 마시던 나날. 학교 앞도 대학로도 아닌 다른 곳이 없을까를 이야기하던 중 누군가 광장시장을 추천했다. 가난한 대학생도 넉넉하게 먹고 마실 수 있고, 쭉 늘어선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는 색다름도 있고, 마을버스를 타면 학교에서 한 번에 갈 수 있기에 가기도 편하고. 다섯 명이 의기투합해 광장시장을 찾았다.


시장을 한 바퀴 휙 돌아보고 내가 자란 소도시의 이름을 딴 포장마차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은 회, 두 번째는 족발, 세 번째는 빈대떡과 떡볶이. 먹고 싶은 안주는 모두 먹어보겠다는 마음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세 곳의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셨다. 그때마다 아주머니들의 인심은 넘쳐서 우리가 낸 돈보다 더 많은 안주를 먹을 수 있었다. 아슬아슬한 막차 시간. 이제 더는 '조금만 더', '한잔만 더'는 안된다고 일어나는데 시원한 바다 향기가 발길을 붙잡았다. 세 곳의 포장마차에서 먹지 못한 바지락 칼국수였다.


"칼국수 먹고 가. 그래야 내일 속이 덜 아프지. 나도 다 팔아버리게 한 그릇 돈만 내고 먹어."


우리의 머뭇거림을 귀신같이 알아챈 아주머니의 한 마디. 하지만 돈을 탈탈 털어 술을 마셨던 터라 칼국수 한 그릇 값도 우리에게는 없었다.


"나 비상금이 있긴 한데... 이거 쓰면 택시 탈 돈이 없어."

"우리가 여기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 돈 쓰고 학교까지 걸어가자. 너는 얘네 집에서 자고."


내가 답을 제시했고, 비상금 주인은 내 답을 정답으로 만들었다. 포장마차에 착석. 비상금은 인원수에 맞춰 칼국수를 먹을 수 있는 돈이었지만, 아주머니께서는 괜찮다며 한 그릇 돈만 받으신 채 마지막 남은 세 그릇을 다섯 그릇으로 나눠주셨다. 시원한 칼국수와 개운한 김치는 알싸함을 원했고, 이번에도 비상금 주인은 정답을 맞혔다. 소주 한 병을 주문한 것. 우리는 진짜 마지막이라며 격한 '캬' 소리와 함께 한 잔씩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든든한 속, 알딸딸한 머리, 조금 휘청거리는 걸음, 살짝 어눌한 발음, 무엇보다 넉넉한 인심으로 따뜻해진 마음을 갖고 차가운 공기 속으로 나섰다. 여름이 다가오는 계절이었지만 아직 밤공기는 찼다. 사람들로 가득했던 인도는 우리뿐이었고, 차들로 빽빽했던 도로는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내는 총알택시뿐이었다.


누구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게들도 모두 문을 닫아 적막한 거리. 노래를 듣는 것은 우리와 우리의 발을 비추는 가로등뿐이었다. 한 명이 노래를 끝내면 다른 사람이 이어 부르고 때로는 같이 부르며 우리의 노래는 꽤 오래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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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낭만적이지 않냐?"


평소 논리와 근거를 중시하며 낭만의 'ㄴ'도 모를 것 같던 녀석이 말했다.


"삭막한 도시가 오늘따라 따뜻하네."

"오늘 밤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아."

"청춘에 딱 어울리는 밤이었다."


영화 한 줄 평처럼 다들 한 마디씩을 보탰고, 마지막은 내 차례였다.


"걸으니까 느낄 수 있는 낭만인 거야. 내가 이래서 늘 걷는다니까."


빽빽한 사람들과 화려한 불빛 속에서 이성을 놓치면 누군가 내 코를 베어 가리라 생각했다. 복잡하게 얽힐 대로 얽혀 낭만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대도시. 하지만 이른 시간 대학로를 걸으며, 늦은 시간 종로를 걸으며 나는 이성을 내려놓고, 낭만을 느꼈다. 빽빽한 사람들과 화려한 불빛이 사라진 거리를 두 발로 누비자 도시는 내게 낭만을 보여줬다. 지하철도 버스도 제대로 못 타는 내가 향수병 없이 무사히 서울살이를 해낼 수 있었던 건 바로 낭만 때문이었고, 걷기 때문이었다. 내게는 지하철이 아닌 걷기가 서울살이의 만병통치약이 됐다.



광장시장 사진 by 이범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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