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걷기의 시작

by 여유수집가

두두둑 두두둑 두두둑. 주변의 다른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며 거센 비가 내린다. 차 깊이 파묻었던 몸을 일으켜 창문에 바짝 다가가 앉았다. 이대로 목적지로 가는 게 맞는 건지, 차를 돌려야 하는 건 아닌지 조수석의 엄마가 아빠에게 물었다. 엄마의 긴장된 목소리에 내 얼굴이 찌푸려진다. 돌아가기 싫다고 아빠에게 보낸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운전석의 아빠는 단단한 목소리로 말한다. "걱정하지 마. 괜찮아. 계속 가자."


걱정하지 말라는 아빠의 말에 장단을 맞춰 콧노래를 부르는 열두 살의 나와 어떻게 걱정이 안 되냐는 엄마의 말에 장단을 맞춰 빗소리가 무섭다는 열한 살의 동생. 다른 두 감정이 교차하며 차 안의 분위기는 오락가락했지만, 차는 앞만 보고 달려 목적지인 자연휴양림 캠핑장에 도착했다.


매표소로 뛰어간 아빠. 점퍼를 입으라는 엄마의 외침은 덩그러니 차 안에 남았다. 비에 젖은 채 표를 건네는 작은 구명으로 몸을 숙였던 아빠가 몸을 일으켜 세우고 차를 향해 손을 흔든다.


"우리 못 들어가는 거야?"

"아니야, 저건 다 잘 되고 있다는 거잖아."


빗소리가 무서운 동생과 캠핑에 설레는 내가 바라본 아빠는 달랐다. 엄마의 시선이 궁금했지만 묻지 못했다. 꼿꼿하게 세운 엄마의 등은 벌써 말을 하고 있었다. 어떤 상황이든 문제라고.


매표소 밖으로 비옷을 입은 직원이 나왔다. 아빠와 매표소 직원은 함께 차량 통행을 막기 위해 세워둔 구조물을 옮겼다. 물 뚝뚝 떨어뜨리며 차로 돌아온 아빠. 엄마는 아빠에게 수건을 건네며 점퍼를 입고 갔어야 했다고 타박했지만, 아빠는 엄마에게 타박과 쓰지 않은 수건을 고스란히 돌려주며 뒤를 돌아 나와 동생에게 미소를 보였다.


"원래 차는 못 들어가는데 우리만 왔다고 들어가게 해 준데. 방갈로까지 차로 가는 거야. 비도 안 맞고 잘 됐지? 방갈로 위에 텐트를 치면 비에도 끄떡없어."


아빠는 혼자서 하겠노라 차 밖으로 나서 거센 장대비를 뚫고 짐을 날랐다. 우산을 쓰고 내린 엄마도 이내 우산을 접어두고 짐을 나른다. 쏟아붓는 비에 짐이 다 젖을까 걱정. 세찬 바람에 텐트가 날아갈까 걱정. 비와 바람 속에 엄마와 아빠는 괜찮을까 걱정. 조마조마한 시간이 흐른 뒤 텐트는 모양을 갖췄다. 차 안에서 동생과 숨죽이고 기다리며 하늘만 원망하고 있었는지 걱정 사이사이 여행의 설렘을 간직하고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머리에 묻은 물기를 말리며 이것도 추억이라고 웃던 아빠의 얼굴은 생생하다.


커다란 아이스박스 안에는 고기와 쌈채가 들어있었지만 엄마는 물을 끓이고 라면을 꺼냈다. 집에서는 먹지 못하는 라면이기에 고기보다 더 반가웠다. 여름 기운을 앗아간 서늘한 비에 따뜻한 라면 국물은 천상 음식이 되어 우리의 걱정과 불안을 앗아갔다. 점점 거세지는 빗소리가 노래라며 내가 코펠에 포크를 두드려 장단을 맞추자 동생은 후루룩 면을 들이키며 음을 보탰다. 아빠와 엄마는 여기에 웃음소리를 얹었다. 넓은 캠핑장에 빛을 밝힌 건 우리뿐이었지만 그 빛은 무거운 하늘을 뚫고 저 위로 전해질 것만 같았다.


따뜻한 라면 국물의 힘도 우리의 경쾌한 웃음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여전히 거센 비는 라면 국물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 싸늘한 냉기를 불러왔고 우리는 일찍 텐트 안에 누웠다. 오지 않는 잠을 끝말잇기로 불러들이며 서로를 꼭 끌어안고 서로의 온기에 의지했다.


훅~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에 눈을 뜨니, 언제 그랬냐는 듯 비는 말끔히 그치고 빗방울에 반사되는 햇빛이 아침을 알렸다. 밤 내 텐트 안에서 웅크렸던 몸을 쭉 펴며 우리 가족은 휴양림을 걸었다. 숲이 전하는 청량한 공기를 마시며, 나뭇잎에 대롱대롱 매달린 빗방울을 톡톡 건드리며, 어제 종일 내린 비에 넘칠 듯 채워진 계곡의 콸콸콸 물소리를 들으며, 질퍽한 땅을 밟고 걷는 길. 물안개로 둘러싸인 숲은 신비로운 동화 세상 같았다.


쑥~ 아빠의 손이 얼굴 앞에 닿는다. 물기를 머금은 산딸기가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다. 앙증맞게 작고 붉은 알맹이를 입 안에 쏙 넣자 새콤하고 달콤한 맛이 팡 터져 혀를 간지럽힌다. 내 입 안의 달콤함을 알아챘는지 벌이 주위를 맴돌고, 새콤달콤한 맛을 벌에게 양보할 마음이 없는 나는 그 맛을 전부 끌어모아 한입에 꿀꺽 삼켰다. 열두 살의 내 일기에는 이 날이 이렇게 쓰여 있다. '이렇게 낭만적인 길을 걷는 것은 처음이다.'


열두 살의 일기

아빠의 여름휴가로 떠난 청옥산 자연휴양림에서의 추억. 어릴 적 행복한 기억으로 제일 먼저 떠오른다. 이날부터인 것 같다. 내가 걷기를 좋아하게 된 것은. 다음 날 일기에 '주차장에서 불영사까지는 새벽에 걸으면 좋겠다'라고 써둔 것을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걷기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 열두 살. 이때부터 나는 걸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빠의 등산을 따라다녔고, 아빠와 강으로 바다로 수석 채집을 다녔고, 성인이 된 뒤에는 유럽을, 호주를, 아시아 곳곳을 걸었다. 우리 땅 곳곳 역시 놓치지 않았고, 이제는 제주에서 올레를, 오름을, 귤밭을, 바다를 걷고 있다.


열두 살 꼬마가 열한 살 꼬마의 엄마가 되기까지 그 걷기의 여정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매번 좋았던 것은 아니다. 때론 넘어지고 헤매며 괜히 나섰다고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햇빛이 거실로 스며드는 날에는 어김없이 집을 나서 걷고 있는 나를 보면 그 후회는 잠깐일 뿐, 나는 아무튼 걸어야 하는 사람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