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만에 버킷리스트를 이루다

by 여유수집가

27살에서 28살이 되던 연말과 연시, 나는 스페인에 있었다. 5일의 휴가를 이용한 7박 9일의 여행이었다. 우연히 들어간 세비야의 작은 식당에서 유일한 동양인으로 동네 주민들이 맛보라고 건네주는 음식에 따뜻함을 느낀 시간, 버스 안에서 어린 시절 스페인에서 살았던 한국 청년을 만나 언어 장벽 없이 편하게 그라나다를 여행했던 기억,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바뀔 때 스페인 풍습에 따라 포도를 먹고 소망을 이야기하며 모두 함께 즐겼던 호스텔의 파티. 어느 하나 잊을 수 없는 추억 속에 한 가지 다짐도 남겼다. 시간이 흘러 엄마가 됐을 때 아이와 함께 까사 바트요에 다시 오겠다고.


가우디의 도시인 바르셀로나에서 구엘 공원을 비롯해 사그라다 파밀리아와 까사 밀라, 까사 바트요를 돌아보며 그의 놀라운 상상력과 예술성에 매료됐다. 외관에서 홀린 마음은 계획에 없던 내부로 발길을 이끌었고, 건물마다 감탄이 절로 나왔지만 까사 바트요는 조금 특별했다. 가족 단위 관광객이 많았고, 특히 아이들은 재잘재잘 목소리를 높이며 나도 알아볼 수 있는 몸짓을 했다. 물고기 흉내와 수영 시늉이었다. 건물 안을 바닷속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과 건물이 바다가 되는 그 엄청난 상상력을 내 아이도 느꼈으면 했다.


결혼 10주년의 11월 마지막 주, 우리는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10년도 더 된 다짐 때문은 아니었다. 유럽을 꼭 가야겠다는 내 선포에 유럽에서 그나마 덜 추우면서도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바르셀로나를 남편이 고른 덕분이었다. 12시간을 넘게 날아가서 도시 하나만 보고 오기는 아쉽지 않냐고 많은 사람이 물었지만, 아이와 함께 즐기려면 느린 여행이 최선임을 알아버린 우리에게 한 도시에 머무는 여행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여행의 첫 일정은 원데이 가우디 투어였다. 11년 전 아이와 다시 오고 싶었던 까사 바트요도 투어 일정에 속해 있었지만 외관을 보며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아쉽지는 않았다. 무려 7박 9일을 바르셀로나에서 보내는데 내일 다시 오면 되는 것 아닌가. 특히 하이디가 가이드 설명을 너무 잘 들어주어 가우디의 생애와 건물 특징을 알고 내부를 관람할 아이의 반응이 더 기대됐다.

다음 날, 9시 오픈 시간에 맞춰 까사 바트요 입장권을 구입했다. “어른 2명에 아이 1명이요.” 매표원은 아이 나이를 물었다. “여덟 살이요.” 어른 2명의 표만 건넸다. 여덟 살부터는 주니어 표를 사야 하기에 어글리 코리안이 되기 싫었던 나는 매표원에게 주니어 표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검표원이 물어보면 일곱 살이라고 해요.” 아, 매표원이 권하는 꼼수라니! 엄지까지 번쩍 들어 보이는 검표원에게 활짝 웃어주는 것이 공범자가 된 나의 답례였다.


여행 전부터 하이디는 이곳을 기대했다. 엄마의 바람이 담긴 곳이어서는 아니었다. AR 기기로 건물을 구경할 수 있다는 여행 책자의 소개 덕분이었다. 한국어 설명도 가능한 AR 기계를 챙긴 하이디는 엄마와 아빠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만의 구경을 나섰다. 분명 비어있는 곳에 가구가 보이고 물고기가 헤엄치는 AR의 마법은 건물을 더 생생하게 만들었다. AR로 구현된 상상은 또 다른 상상을 불러와 건물이 품는 이야기는 더더욱 다채로워졌다.


입을 좀처럼 다물지 못하고 고개를 쑥 뺀 채 눈을 반짝이는 아이가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를 반복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즐기는 모습에서 깊게 심호흡해야 했다. 11년 전 나의 바람이 이뤄지는 순간, 가슴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탓이었다. 미혼인 내가 내 아이의 모습을 상상했던 그 자리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 어여쁜 아이가 호기심을 반짝이며 섰다. 과거와 현재가 합쳐지는 순간의 감격이란! 터질 것처럼 넘실거리는 모든 감각을 정돈하느라 한동안 창가에 가만히 서 있었다. 머무는 엄마를 내버려 두게 만드는 매력에 까사 바트요는 11년 전보다 더 근사해 보였다.

예상보다 더 오랜 시간을 머문 뒤 건물을 나서며 하이디에게 물었다.


“어땠어?”

“우리가 스노클링 하는 것 같았어.”


11년 전만 해도 까사 바트요 내부에서는 한국인을 볼 수 없었다. 다들 외관만 보고 지나가는 탓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홀린 듯 내부로 들어섰고, 건물이 바다가 되는 상상력을 내 아이가 느끼길 바랐었다. 사소한 바람이었고, 한동안 잊고 있었던 버킷리스트였지만 결국 이루어졌다. 11년이 지나 너무도 완벽하게!





모든 사진은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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