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유수집가 Aug 12. 2023

어린 나, 어린 딸, 지금의 내가 만나는 순간  

노을 단상

제주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바람 많은 섬답게 구름의 움직임이 잦아 조금 전까지 구석까지 스몄던 햇빛이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하고, 어둑어둑하던 하늘이 순식간에 환해지기도 한다. 내가 선 자리는 환한데 저 멀리는 어둑하기도 하고 또 그 반대인 경우도 잦다. 그러니 여행객들에게 지금 있는 곳에 비가 오면 비 안 오는 다른 곳을 찾아가라고 조언하는 것. 제주시는 비가 와도 서귀포시는 비가 안 오는 경우가 흔하니까.     

 

변화가 익숙해지니 그러려니 싶다가도 오후 6시 무렵이 되면 무뎌진 변화를 예민하게 살핀다. 특히 하늘의 구름 정도가 내 시선을 예민하게 하는 대상이다. 오늘 저녁 일몰 상황을 점검하는 것. 하늘을 덮는 구름이 적다면, 저 멀리 보이는 바다 위로 하늘색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면 내 움직임은 분주해진다. 스마트폰에서 정확한 일몰 시각을 확인하고 외출 계획을 세운다. 차 트렁크에는 언제나 캠핑 체어가 있으니 집에 간식거리가 있다면 간식거리를 챙기고 없다면 또 없는 대로 나서면 된다. 일몰 시각 20~30분 전이면 충분하다. 우리 집에서 내가 애정하는 일몰 스팟은 차로 10분이면 도착하니까.      


매일 해는 진다. 내가 일몰을 보는 장소는 매번 비슷하다. 같은 장소에서 매일 지는 해를 보는 것뿐인데 그 마음은 매번 다르다. 아니, 계절에 따라 해가 바다로 안겨드는 위치가 다르고, 매번 하늘의 구름이 다르고, 매번 나를 둘러싼 공기의 밀도가 다르니 같은 장소 매일 지는 해라도 매번 다른 풍경을 보는 것이 맞을 테다. 어쩌면 매번 같은 감동을 느껴도 너무 좋아 지겹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고.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오늘 봤어도 내일 또 보고 싶은 일몰. 유독 일몰을 좋아하는 나의 기원을 찾았다. 초등학교 3학년 일기장에서! 동시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일기장에 유독 ‘노을’을 동시로 남겼으니 ‘노을’이 좋아서가 아닐까.      


1990년 1월 22일 화
노을

해가 질 때면
빨간 하늘이 되지요
해를 따라
천천히
흘러 가지요
구름에게
바람에게 손짓하면서
고운 빗살 되어서
흘러 가지요
바람도
구름도
빨간 하늘에게
인사하지요
빨간빛 노을은
바람타고 점점 흘러 가지요     


여덟 살의 내가 남긴 노을을 마흔두 살의 내가 공감한다. 기록의 힘이다. 내가 왜 노을을 좋아하는지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고, 여덟 살의 나와 마흔두 살의 내가 여전히 비슷한 구석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으니. 여기에 딸까지 내 일기장을 읽으며 말한다.      


“엄마랑 나는 정말 많이 닮았어. 나도 예전부터 노을 좋아하잖아. 아, 나도 제주 와서 노을이 좋아진 거니까 그럼 나이도 같아. 나도 초등학교 3학년에 제주에 왔잖아.”     


딸의 말에 나는 딸이 쓴 ‘노을’ 동시를 떠올린다. 열한 살에 쓴 동시다.

2022년 6월 21일
노을 풍경

벌써 해가 질 시간이다.
이 시간이면 나는 빌라 앞쪽으로 간다.
하늘이 복숭아처럼 붉게 물들고 있다.
사진을 찰칵찰칵 찍을 때도 있고
눈으로 계속 멍하니 볼 때도 있고
보면 볼수록 힐링되고
감성도 충전되는
노을 풍경이
제주에서는 눈에 아주 잘 띈다.
오늘 해 질 시간이 기다려진다.


여덟 살의 나도, 열한 살의 딸도 ‘노을’에 대한 동시를 남겼으니 이제 마흔두 살의 내가 시를 쓸 차례인 건가. 시를 쓰지는 못하겠고 이렇게 긴 글로 대신하며 또 하나의 기록을 쌓는다. 열한 살 나와 지금 열두 살인 딸과 마흔두 살인 내가 한 지점에서 만나는 순간을 남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