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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유수집가 Dec 05. 2023

다시 서울로 돌아갑니다

<여유가 두려운 당신에게>를 출간했다. ‘여유가 두려웠던 사람이 여유를 누리며 살게 된 삶’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여유를 누리며 사는 삶의 배경이 ‘제주’이다 보니 ‘제주에 살아서 부럽다.’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그런 독자들께 나는 말한다. “1월 말에 서울로 돌아갑니다.”     


처음 제주행을 택할 때는 우선 2년을 살아보고 다음을 결정하자고 했고, 1년을 살면서 계속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4학년 올라가던 시점에 제주 중학교에 대해 탐색한 뒤 로드맵을 그렸다. 이때만 해도 남편은 아침과 저녁 식사를 제공하는 건물에서 근무했다.      


가족 대화에 '서울 복귀'가 등장한 건 남편의 발령이 기점이었다. 핵심 부서로의 발령이라는데 근무하는 건물이 바뀌게 되면서 회사에서 아침, 저녁 식사가 불가능해졌다. 안정적이던 주말부부 생활에 삐걱거림이 생겼다. 의식주에 있어 ‘식’의 중요성을 체감했다. 요리를 싫어하는 남편에게 배달 음식과 간편식이 비중을 넓히며 굳은 표정도 늘어났다.     


업무 스트레스의 증폭도 남편의 입에서 자꾸만 ‘서울 복귀’를 끄집어냈다. 가족과 지인들은 하나같이 MBTI ‘F’라고 하는데 직원들은 하나같이 ‘T’라고 한다니, 스트레스의 정도가 짐작되는 상황. 남편은 본연의 ‘F’로 돌아와 감정을 나눌 상대가 필요한데 텅 빈 집으로의 퇴근이 외롭다고 했다.      


남편의 힘듦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서울 복귀’는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마음을 맴돌던 말이 선명한 소리를 갖게 되는 순간 계약서의 효력을 가질 것만 같았기에 조심스러웠다. 공포의 도시도 아닌데 서울로의 복귀는 내게 다시 여유를 빼앗아갈 것 같은 두려움을 갖게 했다.      


지난여름 서울에서 저녁 모임이 있었다. 아이 다섯 살부터 제주에 내려오기 직전까지 함께 했던 공동육아 엄마들과의 만남이었다. 동네에서의 만남이라 늘 걷던 길을 걸어 약속 장소로 향했다. 경사가 급하다는 것 외에 특별한 감상을 가진 적 없던 길에서 나도 모르게 멈춰 섰다. 단단한 벽 사이 비좁은 공간을 뚫고 고개를 내민 진분홍 꽃에 시선이 붙들린 것. 가만히 바라보다 조심스레 사진을 찍었다. 찰칵 셔터 소리와 함께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공포의 서울에서 살만한 서울로의 전환이었다.      


더는 사는 장소가 중요치 않다는 자각을 했다. 내게 여유는 이미 단단한 코어 근육으로 자리했기에 제주든 서울이든 여유를 미루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분주한 서울에서 여유를 수집하는 일이 복잡한 미로 찾기처럼 새로운 놀이가 될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생겼다.      


2년 전 지금 사는 제주집 전세 계약을 하며 만기를 24개월이 아닌 21개월로 했던 건 아이가 중학교를 어디로 진학하게 될지 몰라서였다. 남편은 ‘서울’로 진학을 바랐고, 나는 ‘서울’일 수도 있지만 ‘제주’일 수도 있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 미련 때문에 남편이 서울로의 이사만 이야기하면 슬며시 화제를 바꿨다. 하지만 지난여름 서울행 이후 미련을 떨쳤다. 4년 동안 제주에서 오롯하게 내가 만족하는 삶을 살았으니 이제는 남편이 바라는 삶으로 내가 들어가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무엇보다 남편만 바라는 삶이 아니라 나 역시 그 삶에서 계속 행복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긴 덕분이었다.      


입 안에서 맴돌던 ‘서울 복귀’가 이제는 경쾌한 음률로 소리를 가진다. 제주 전셋집 다음 거주자 찾기, 이사 준비, 서울집 리모델링, 아이 서울 중학교 배정 등 챙겨야 할 문제가 여럿이지만 출간 이후에는 설렘까지 더해졌다. 육지에서 더 많은 독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저, 1월 말에 서울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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