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의 일기
1992년 12월. 큰 고깃집에 손님들이 꽤 많이 모였다. 가족 동반 송년회였다. 저물어 가는 한 해의 아쉬움을 나누는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숨죽인 환호와 탄식이 오가는 자리였다. 아빠에게 속삭이며 사이다를 주문해도 되냐고 물었고, 사이다를 마실 때조차 소리를 내면 안 될 것 같았다. 빈 술 병이 하나 둘 늘어나며 숨죽였던 소리들은 점점 볼륨을 키웠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고기 추가가 안된다는 안내와 함께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서 허겁지겁 모임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1992년 12월 18일, 제 14대 대통령 선거일. 경상북도 포항의 한 고깃집에서 호남 향우회가 열렸다. 개표방송 중계를 보며 우리가 환호하는 순간에 다른 테이블은 탄식하고, 우리가 탄식하는 순간에 다른 테이블은 환호하는 묘한 광경. 김영삼 후보자와 김대중 후보자를 사이에 둔 갈등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인 나는 지지하는 후보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향하는 싸늘한 시선과 고기 추가가 안된다는 거짓말로 우리를 내모는 사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1993년 어느 날. "야구 삼성 응원하는 사람?" 선생님께서 장난스레 물으셨다. 교실의 거의 대부분이 손을 번쩍 들었다. 남은 5~6명은 롯데. 한 친구가 나를 가리켜 아직 손을 안 들었음을 선생님께 알렸다. "무슨 팀 응원하노?" 왠지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해태요." 나 혼자였다. 제일 잘하는 팀이라며 편을 들어주시는 듯했던 선생님의 말투에는 씁쓸함이 묻어났다. 나는 꼭 파란 바다 위 붉은 섬에 홀로 있는 기분이었다.
1994년 여름.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멈춰 섰다. 정류장도 신호등 때문도 아니었다. 사고가 난 걸까 어리둥절한 사이, 코 끝이 매워지고 눈은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던 나와는 달리 다른 승객들은 모두 입과 코를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는 내게 손수건을 내밀며 어서 입과 코를 가리라고 하셨다. 데모란다. 승객들은 동요하지 않았고, 데모가 끝나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경상북도에서 전라남도로 전학을 오고 있었던 일이다.
1995년 4월, 봄소풍. 광주 비엔날레를 찾았다. 붉은 조명으로 채워진 공간에 흑백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5·18 민주화운동의 사진들이었다. 사회시간,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들이 눈 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선생님이 왜 꼭 기억해야 한다며 울분에 차 설명을 했었는지 이해가 됐다. 나 역시 가만히 멈춰 서서 벌게진 눈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선생님은 나의 우상이 됐고, 선생님의 18번인 '광야에서'와 '솔아 솔아 푸른 솔아'는 내게도 18번이 됐다.
1993년의 붉은 섬은 1994년 섬 안에 있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님을 깨달았고, 1995년 그 뿌리는 과거에 있음을 알게 됐다. 과거를 보다 더 잘 알기 위해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읽었고 내가 유일하게 필사에 도전했던 책은 임철우의 '봄날'이 됐다. 이해할 수 없는 편 가르기를 경험했던 꼬마는 그 이유를 스스로 찾아봤고,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에 눈을 뜨게 된다. 한때 인권변호사를 꿈꾸고, 신문기자를 희망했고, 시민단체에서 자원활동을 했던 경험은 불만 가득했던 꼬마에게서 시작됐다.
2017년 5월 18일. 늘 그렇듯 사무실에는 음소거로 YTN 뉴스가 틀어졌다. 소리 없는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 중계를 보다 나도 모르게 눈물 방울을 떨궜다. 모두가 맞잡은 손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던 그 시각, 나 역시 입을 벙긋하며 마음으로 노래했다. 붉은 조명 아래 있던 흑백 사진이 따사로운 봄볕 아래서 칼라로 변하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그저 평범한 소시민으로 내 삶의 안위가 더 중요한 사람이 되었지만, 내 딸이 살아갈 세상은 더이상 붉은 섬이 아니길 바라는 희망은 믿음이 된다.
그래, 오늘은 임을 넘어 우리 그리고 미래를 위한 행진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 시작은 나와 아이가, 우리 모두가 들었던 촛불이 이뤄냈다. 그렇게 작지만 조금씩 빚을 갚으며 살아가야겠노라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