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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구출작전의 최후, 루체른 시내를 걷다

일곱살과 스위스 일주일

by 여유수집가

스위스의 여름 해는 10시가 다 돼서야 저문다. 교통박물관에서 돌아와 호텔 체크인을 마친 시간이 3시. 마냥 저무는 해를 기다릴 수는 없기에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루체른 시내 관광이다. 카펠교에서 시작해 예수 교회를 지나, 슈프로이어교, 구시가지, 무제크 성벽을 거쳐 빈사의 사자상으로 이동하는 일정. 모두 도보로 가능한 거리였다.


추천 일정은 빈사의 사자상에서 빙하 공원을 보고 호프교회를 거치는 것이었지만 자꾸 다리를 긁는 아이의 모습이 수상해 살펴보니 모기에 물린 자리가 이미 덧난 상태였다. 모기 자국으로 인해 덧난 곳이 농가진으로 번진 경험이 있던 터라 덜컥 겁이 난 나와 남편은 번갈아가며 아이를 업고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겁이 난 것은 부모의 마음. 아빠 한 번, 엄마 한 번 업어주는 것이 아이는 좋았던지 등 위에서 절로 노래를 불렀다.


엄마의 마음은 예수 교회에서 차분히 기도도 하고 싶었고, 슈프로이어교의 지붕 판화를 찬찬히 살피고도 싶었고, 구시가지 가게마다 가진 매력을 들여다보고도 싶었고, 무제크 성벽에 올라 루체른을 내려다보고도 싶었고, 빈사의 사자상에서 멋진 사진을 남기고도 싶었고, 빙하 공원 거울의 방에서 깔깔 웃고도 싶었다.


카펠교에서의 아이

하지만 아이의 마음은 달랐다. 조용히 있어야 하는 교회가 싫었던 아이는 빨리 나가자고 재촉했고, 다리는 달려 다니기 바빴으며, 가게는 일요일이라 문을 다 닫았기에 쇼윈도를 살피는 것조차 의미가 없었다. 모기 상처 때문인지 걷기가 싫어진 아이에게 무제크 성벽이 의미가 있을 리 없었고, 빈사의 사자상에서도 엄마와 아빠가 원하는 사진 포즈는 전혀 취해주지를 않았다. 이상한 표정이 자기는 마음에 든다는데 도대체 못나게 찡그리는 표정을 누가 예쁘다고 한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사실 아이는 루체른을 걷는 내내 내게 '동화 구출작전' 놀이를 하자고 했다. '동화 구출작전'은 동화 주인공 역할을 각각 나눠 맡은 뒤 줄거리에 맞춰 이야기를 완성해 구출해주는 놀이다. 놀이의 출처는 도무지 모르겠지만 풍경을 즐기는 동안에도 머릿 속은 계속 동화 내용에 맞는 내레이션과 역할에 맡는 대사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에 점점 짜증이 났다. 툭툭 던지면 대충한다고 지적하며, 멍하니 풍경을 즐기는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아이가 야속하기만 했다. 토끼와 거북이, 인어공주, 백설공주, 피터팬 등등 구출해야 하는 동화도 끝이 없었다.


구시가지에서 분명 예쁜 포즈라는 아이

모기 물린 곳을 긁는다고 크게 혼이 난 뒤 시무룩해진 아이. 드디어 동화구출작전 놀이는 끝이 났다. 사실 이 곳에서 오후 5시는 서울의 밤 12시. 이틀 만에 시차 적응이 될 리 없는 아이에게 오는 잠을 버티는 힘이 '동화 구출작전' 놀이였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일곱살이 유럽의 중세 도시 매력을 느낄 리 없지 않은가. 자연으로 향하는 내일, 아이의 다른 모습을 기대함과 동시에 나 역시 보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아이의 놀이에 동참하리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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