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차, 못난 엄마 그럴 수도 있다 - 헬로키티아일랜드

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by 여유수집가

매일 9시 무렵 잠이 드는 하이디는 알람을 맞춰둔 것처럼 6시50분이면 일어난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좋은 습관을 탓할 수는 없지만 뭉기적뭉기적 뒹구는 삶을 지향하는 엄마에게는 조금 벅찬 딸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6시50분에 일어난 하이디의 첫마디는 "배고프다.". 그다음은 "오늘은 헬로키티아일랜드에 가는 날."이다. 하이디 다섯살에 이미 한 번 다녀왔던 곳. 두 번은 가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가 없다.


카카오맵만 믿고 길을 나섰다. 한 번 환승하는 노선은 지선버스가 포함된 노선. 두 번 환승하는 노선은 간선버스로만 이뤄졌기에 두 번 환승을 선택했다. 배차 간격이 짧을 것이라 예상하면서. 제주 거주인 코스프레를 하며 설렁설렁 나와 아이와 장난치며 아무 긴장 없이 있던 내가 잘못이다. 출발부터 버스 한 대를 가뿐히 놓쳤다. 그래, 제주도는 버스정류장에 가만 앉아서 기다리면 안 된다. 꼭 일어나서 나 정류장에 서 있소 표시를 해야만 기사님이 버스를 멈춰주신다. 다행히도 배차간격이 짧은 버스. 10분을 기다리니 다음 버스가 도착했다.


20170831_102826.jpg "버스는 언제 와?"

우리 집 앞 정류장에 서는 202-1번은 보통 배차 간격이 10분 정도. 그래서 간선버스는 모두 그런 줄로만 알았다. 역시나 설렁설렁 나온 내 잘못. 다음에 타야 하는 270번은 시간대에 따라 배차간격이 20분부터 40분까지. 그나마 다행. 25분만 기다리면 된다. 이때부터 긴장 시작. 버스를 놓치면 안 된다는 목표 달성 의지가 불끈 솟았다. 택시도 있는데 하면서 여유 부리면 되는데 버스로 목적지까지 가고 말겠다는 오기가 발동한 거다. 270번은 무사 탑승. 한 번 더 환승해야 한다. 이번에는 282번. 다행히 배차간격이 15분이다.


9시30분에 집을 나서 헬로키티아일랜드에 도착한 시간, 11시30분. 햇볕 뜨거운 길에서 두 시간을 보내고 나니 이미 지쳤다. 그래도 버스만으로 온 것은 장하다고 생각하려 했는데 설렁설렁은 또 한 번 문제를 만든다. 분명 제주 유명 관광지 아무 곳이나 두 곳의 방문이 가능하다고 해서 구입한 '브이패스자유이용권'. 헬로키티아일랜드는 해당이 안된단다. 아, 미리 확인하고 올걸. 안 되는 줄 알았으면 다른 할인권을 미리 구매했을 텐데. 요즘 정말 흔하지 않다는 입장료 제 값 다 내는 관광객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입장했으니까. 한껏 신이 난 아이를 보며 다 괜찮다 괜찮다 주문을 외우고 있는데 요 녀석! 무엇이 그리 급한지 달려 다닌다. 다섯살 때 삼십분을 머물렀던 헬로키티 댄스홀도 한 번 보고 지나치기 바쁘고. 아니 이건 뭐 한 시간도 안돼서 관람이 모두 끝날 판이다. 내가 왜 이렇게 애써서 여기를 왔나. 내가 왜 기렇게 비싸 돈을 내고 여기를 왔나. 괜찮다가 후회로 변하려는데 이유를 알았다. 그놈의 기프트샵 때문이었다. 입구 옆에 있는 기프트샵. 제일 먼저 들어가고 싶다는 하이디에게 제일 마지막에 갈 수 있다고 했더니 그곳을 가기 위해 다른 곳을 다 지나치고 있는 거였다.


아, 이 허망한 순간. 이론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아이에게 협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헬로키티 영화 보고, 카페에서 간식 먹고 기프트샵에 가야만 선물 한 개를 사주겠다고. 선물을 사기 위해 마지못해 엄마의 요구에 응한 하이디. 카페에서 간식 겸 점심을 먹으며 물었다. "이렇게 쓱쓱 보고 가면 아쉽지 않을까?". 하이디의 명 대답, "기프트숍 가서 사고 놀고 그러면 되지.". 사고 나서 다시 돌아보면 되는 거였다. 처음 여기 올 때부터 무엇 하나는 오늘 사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줄 거였으면 순서가 뭐가 중요했을까. 어쩌다 보니 참 못난 엄마가 됐다.


20170831_132404.jpg 댄스홀에서 따라하기 삼매경
20170831_133442.jpg 두번째 투어에서는 왕관 만들기도 척척

기프트숍에서 이 물건 들었다 놓고, 저 물건 들었다 놓고. 고심 끝에 고른 것은 스티커 놀이책. 커다란 장난감도 있고, 예쁜 인형도 많은데 소박한 아이의 선택에 엄마의 못남은 더 폭발한다. 그리고 다시 박물관으로 후진. 하나하나 보고 또 보고, 몇 번을 뒷걸음질 치며 다시 또 한 시간을 보냈다. 버스 때문에 긴장하고, 달려 다니는 아이 쫓아다니느라 신경 쓰고, 못난 엄마에 자책하느라 몸도 마음도 피곤한 상황. 그냥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쉬다가 산책이나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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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 버스 여행. 기프트숍에 가야겠다는 목표의식. 아이도 피곤했던 모양이다. 마트에 가자, 산책을 가자 졸라도 그냥 집에 있겠단다. 그렇다고 낮잠을 자는 것은 아니었다. 사가지고 온 스티커 놀이도 하고, 책도 보고, 음악도 듣고, 그러다 심심하면 킥보드도 타고, 다시 올라와 뒹굴거리기도 하며 따사로운 햇살의 오후를 뭉기적거렸다. 엄마는 옆에서 같이 음악도 듣고, 책도 읽고, 잠깐 꼬빡 졸기도 했고. 한량답다. 이게 내가 바랐던 모습 중 하나지 생각하다가도 텅 빈 주차장을 보면서 아, 오후에 어디 한 곳 가야 했던 것은 아닐까 문뜩문뜩 드는 생각. 아직 완전히 느긋해지지는 못한 게다.


그래도 한가로운 시간의 끝에는 평온한 마음이 기다리고 있다. 나의 선택에 번민했지만 서둘러 저녁식사까지 준비를 마치고 나니 마음도 몸도 충전 완료. 하이디는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과 마당에서 놀고 있고, 곱씹어 고른 내 플레이리스트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고 있으니 마냥 그저 모든 것이 다 좋아졌다. 실수할 수도 있지. 그러면서 배우는 거지. 내일은 미리 좀 더 찾아보고 가면 되지. 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의 상태에 따라 똑같은 사건도 달리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그래서 일상의 느긋한 마음이 중요함을 제주 한달살이에서 다시 한번 배운다.




<일곱살 하이디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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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설명: 1층 기피트샵, 2층 영화 관람(의자가 있다), 3층 키티 집

일기설명: 오늘은 목요일. 헬로키티아일랜드 가서 놀고 영화봤다. 신난다. 기프트숍 갔다. 너무너무 좋아서 또 가고 싶다. 공연도 보고 스쿨 가고 집 갔다. 너무 재미가 있었다. 다음에 또 와야겠다. 잘 부탁해. 헬로키티아일랜드! 랄랄라 기분이 좋은 날. 야호. 너무너무 신난다. 아빠도 왔으면 좋겠다. 아빠 언제든 꼭! 보고싶어. 아빠 엄마 사랑해. 사이좋게 지내자.


아이에게 너무 신났던 기억으로 남아 고마운 하루.

그래도 또 가는 건 반대다!



<뚜벅이 이동 경로>

1) 곽지모물 > 202-1(배차간격 15~20분) > 신엄리 > 270(20~40분) > 월산마을 > 282(15분)

> 헬로키티아일랜드

2) 헬로키티아일랜드 > 택시 > 곽지모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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