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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차, 해골의자를 보지 못해도 괜찮아 - 낙천의자공원

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by 여유수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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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여행자는 여행자임과 동시에 생활자이다. 빨래와 청소도 거를 수 없는 법. 일기예보를 보니 강수확률 30%. 오늘은 빨래를 해야겠다. 아파트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 자라고, 지금도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나. 한 번도 야외에 빨래를 널어본 적이 없었다. 빨래 바구니를 들고 나와 마당 한편에 빨래를 너는데 햇볕이 빨래 위에 부서지고, 바람이 빨래를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빨래 널기가 노동이 아닌 낭만이 되는 순간이었다.


어제 너무 무리한 것이 아닐까. 오늘은 천천히 집을 나서기로 했다. 빨래하고 청소하는 동안 아이는 마당에서 킥보드를 타다가 11시30분이 넘어서 집을 나섰다. 먼저 애월로 가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계란말이김밥이 맛있다는 '튀김간'이 목적지였다. 매일 아침 일찍 문을 열고, 하루도 쉬지 않고 가게를 운영하고. 내가 알던 규칙들이 적용되지 않는 곳이 제주다. '튀김간' 역시 오늘은 쉬는 날. 집에서 가까운 애월이라 맛집 몇 군데를 알아놨었는데 그다음 순번, '제주 슬로비'에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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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말이김밥을 먹기로 했는데 먹지 못하게 된 탓인지 아이는 짜증 짜증이었다. 한 걸음 걷고 다리 아프다, 두 걸음 걷고 쉬어야겠다. 그럴 때는 편의점 밖에 방법이 없다. 맛있게 밥을 먹으면 편의점에 가겠다는 약속으로 3분 거리를 10분에 걸쳐 도착했다. 내 아이지만 아이들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참 이상한 곳에서 기분이 풀린다. 가게에 전시된 것 중 '곰 세 마리' 가사를 제주 방언으로 바꿔둔 액자가 있었다. 그 가사를 보여주자마자 따라 부르며 아이는 다시 천진난만한 일곱살로 돌아왔다.


밥 먹는 내내 노래는 이어졌다. 제주 방언 곰 세 마리에서 시작돼 제주항공우주박물관 곰 세 마리, 롯데월드 곰 세 마리, 놀이터 곰 세 마리, 정글탐험 곰 세 마리 등 상상하지 못했던 버전으로 바꿔가며 노래를 불렀다. 낄낄낄 웃음은 당연한 반주였고. "곰 세 마리가 체험하러 왔어. 외계인 체험 곰. 비행기 체험 곰. 로켓 체험 곰. 로켓 체험 곰은 친구들을 조종시켜줘. 비행기 곰은 게임해. 외계인 체험 곰은 이름을 이상하게 써. 모두 모두 피곤해"

* 어제 방문한 제주항공우주박물관에서 있었던 일을 가사에 반영 (동영상 촬영본 가사를 그대로 옮김)


20170830_104251.jpg 여행지 그림카드

오늘의 목적지는 '낙천의자공원'. 사실 아이는 '헬로키티뮤지엄'을 가자고 했다. 하지만 오늘은 우연한 기회로 인연을 맺은 제주도민 가족과 다시 만나기로 한 날. 다섯 살 동생을 만나려면 동생 집 근처에 있는 놀이터를 가야 한다는 말에 아이는 흔쾌히 헬로키티를 양보했다. 물론 조만간 가야 할 것 같지만. '낙천의자공원' 역시 내가 미리 찾아온 장소다. 순전히 놀이터 때문이었다. 스위스 여행 이후 여행지에서 만나는 놀이터의 매력을 알아버렸기에 이번 제주여행에서도 여러 군데 놀이터를 찾아왔다.


20170830_141428.jpg 위험에 빠진 놀이터 구출을 위해 뛰어가는 하이디

아, 안타깝다. 놀이터는 바로 공원 입구에 있었다. 공원 마지막 즈음에 있었더라면 공원을 전부 구경할 수 있었을 텐데. 놀이터를 보자마자 바로 직진! 13시50분에 도착한 공원에서 동생을 만난 4시까지. 아이는 다른 곳 어디도 가지 않고 놀이터에서만 놀았다. 혼자서 뭐가 그렇게 재미있을까 싶지만 그물 사다리와 이리저리 계단을 지나 통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는 코스. 그 단순한 코스에 정글탐험 이야기를 더하니 아이는 지겨운 줄 몰랐다.


20170830_135714.jpg 위험에 빠진 놀이터를 구한 하이디

자기가 좋아하는 '내 품에 라바와 친구들' 캐릭터 중 잠띠, 샤윙, 요르정 중 한 명으로 변신에 위기에 처한 놀이터를 구하는 것이 아이가 정의한 정글탐험 놀이였다. 나는 놀이터가 위기에 빠졌음을 알려주는 뮤짱. 그늘의 의자에 앉아 아이에게 상황을 전달해주면 임무 완료. 한 번은 어둠에 빠지고, 한 번은 괴물이 나타나고, 한 번은 모든 색이 사라지고. 위기의 종류만 바꿔주면 되니 엄마는 편하고 아이는 즐거운 최고의 놀이였다. 거기에 햇볕은 따사롭고 상쾌한 바람은 멈추지 않고 불어온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마냥 좋은 제주다.


공원을 검색했을 때 수많은 의자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해골 의자. 거기서 사진을 찍으면 재밌겠다 생각했었지만 결국 보지 못했다. 2시간을 공원에 머물렀음에도. 그러면 어떠랴. '하늘을 나는 거북선' 놀이터에서 아이는 마음껏 웃었고, 나는 멍하니 머무는 여유를 누렸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업무 스케줄을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 일을 하고, 계획을 달성하지 못하면 초조해하고, 그 사이사이 개인적인 시간도 갖겠다며 그마저 계획을 세우고. 아무 생각하지 않는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했던 날들. 그저 멍하니 있어보니 그 자체가 평온이고,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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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놀이에도 즐거웠던 아이는 제주도민 가족을 만나 함께 놀이의 즐거움도 느낀다. 두 차이가 아이의 마음속에 어떻게 자리할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으로 아이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그저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저녁까지 먹고 집으로 돌아오니 곽지 바다에 노을이 내린다. 나갔다 온 사이 빨래는 뽀송하게 말라있고. 여행과 생활이 동시에 이뤄지는 삶. 노동이 낭만이 될 수 있는 삶. 오늘도 행복하다.




<일곱살 하이디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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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설명: 놀이터에서 엄마와 나 그리고 통 미끄럼틀

일기설명: 오늘은 놀이터에 가서 놀이했다. 정글놀이했다. 다음에 또 해야겠다.


너무 졸려서... 더 그리고 더 쓸 수 없단다.

하루의 마지막에 일기를 쓰니 이런 문제가 있기는 하구나;;



<뚜벅이 이동 경로>

1) 곽지모물 > 202-1(배차간격 15~20분) > 애월리: 제주 슬로비(점심)

2) 애월리 > 202-1(배차간격 15~20분) > 협재리 > 택시 > 낙천의자공원

3) 지인과 함께 한림까지 이동 > 택시 > 곽지모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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