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7시 무렵 일어나 빵과 블루베리로 아침을 먹고, 외출 준비를 해서 집을 나선다. 다시 돌아와 오후 시간을 보내고, 저녁을 먹고 씻고 아이와 책을 보다가 아이를 재운다. 아이가 잠든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일어난 나는 컴퓨터를 켜고 이렇게 글을 쓰기도 하고 웹서핑을 하기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지난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3일 동안의 일상이었다.
어제 설렁설렁 제주도민 코스프레를 자각했던 여행자의 신분을 다시 찾기 위해 오늘은 꼼꼼하게 동선을 확인해 길을 나섰다. 오늘의 목적지는 환상숲곶자왈. 202-1번에서 갈아타야 하는 784-1번 버스는 1시간의 배차간격을 유지하다 8시에서 10시 사이는 2시간으로 배차간격이 벌어진다. 이래도 저래도 맞추기는 애매한 시간. 처음부터 택시를 타기로 결심했다. 물론 202-1번 버스로 옹포리까지는 이동을 하고.
환상숲곶자왈은 매 정시마다 숲해설이 있다. 그저 좋다고 감탄하기만 했던 곶자왈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생각해 찾은 곳이었다. 햇빛을 차지하기 위한 나무들의 치열한 쟁탈전, 단단한 바위 위에 뿌리내리기 위한 나무들의 안간힘.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저 좋다는 감탄에 자연의 신비를 더한다. 내게는 무척 좋았던 설명이 일곱살에게는 어려운 법. 자꾸만 자유 탐험을 하고 싶다고 했지만 어르고 달래 50분의 숲해설을 모두 들었다.
아이의 바람대로 시작된 정글탐험. 숲해설과 함께 돌았던 곶자왈을 다시 한번 아이와 단둘이 돌았다. 뱀이 나올지도 모른다, 저 숨 동굴에는 박쥐가 살지도 모른다며 아이의 이야기를 더하고. 새소리는 이렇다. 바람소리는 이렇다. 소리에 귀 기울여 보기도 한다. 어른의 시선에서 아이의 시선으로 옮겨간다. 마냥 싫기만 했던 숲해설은 아니었나 보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기억해 꾸지뽕나무를 찾고, 콩짜개넝쿨도 찾는다. 그리고 숲의 마지막 벤치에 앉아 그림을 그리겠단다.
숲에서 보낸 시간 한 시간 반. 서두르면 버스를 타고 협재해변으로 이동할 수 있는 시간. 망설였다. 에라 모르겠다. 아이가 그림을 그리겠다는데 이 귀한 숲에 더 머무를 수 있는 건데 가방에서 사인펜과 종이를 꺼냈다. 아이는 숲 탐험 지도를 그리고 나는 숲의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자신의 탐험 지도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내게도 지도를 그려줄 것을 요구. 오랜만에 그림을 그려본다.
한 시간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숲을 떠나는 시간. 우리는 두 시간이 넘게 숲에 머물렀다. 결국은 택시를 불러 집으로 돌아왔고. 오늘은 함께 한달살기를 시작한 사람들과의 웰컴파티가 있는 날. 포트럭 파티이기에 장도 봐야 하고, 못하는 요리도 해야 해서 서둘러 나갔지만 서둘러 돌아온 거다. 5시, 아이들은 도서관에 모여 문패 만들기를 하고. 엄마들은 요리를 한다. 그리고 6시, 파티의 시작. 오다가다 눈인사를 나눈 사람들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는 자리다.
아이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 중에는 결코 나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공동육아를 하면서 깨달았다. 오늘도 그렇다. 아이를 위해 제주에서 한 달을 보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기에 모두 좋더라.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놀고 엄마들은 엄마들끼리 놀면서 바람이 부는 마당에서 저녁을 먹는 시간. 넉넉한 여유와 좋은 인연들과의 기분 좋은 만남이 마음에 솔솔 불어 든다.
맥주에서 시작된 엄마들의 본격적인 파티는 와인으로 이어져 아이들이 이제는 자야겠다며 몰려오고 나서야 막을 내렸다. 꽤 늦은 시간. 거기에 우리 집에는 금요일 퇴근 후 서둘러 제주로 돌아온 남편이 있었고. 엄마들과의 이야기는 남편과의 이야기로 이어져 나의 밤은 아주 늦게 문을 닫았다. 덕분에 일기도 다음 날 오후에 쓰게 되었고. 3일 동안 이어오던 규칙이 깨진 거다.
아침에 일어나니 불안하더라. 아, 일기를 못 썼구나. 어쩌나. 밀리면 계속 밀릴 텐데. 무엇인가 계획하면 계획에 얽매이고 마는 서울의 습성이 아직 남아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숲에서는 남들의 한 시간 규칙을 깨고 두 시간 넘게도 머물렀으면서 일기 하루 밀리는 것에는 왜 그리 집착했는지. 아이는 도서관에서 9살 언니랑 놀고, 남편은 낮잠을 자는 조용한 오후가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다. 규범이 아닌 자신 만의 규칙은 깨져도 되는 거다. 틀에서 벗어날 줄 아는 용기. 나를 위해서도 아이를 위해서도 제주에서 배워가야겠다.
<일곱살 하이디의 일기>
웰컴파티에서 놀다 바로 잠든 하이디는 일기를 쓰지 못했다.
아이가 일기를 쓰지 못했다는 것도 내 마음을 어지럽힌 한 가지 이유.
매일매일 써야만 한다는 규칙을 아이에게 강요하지 않겠노라 결심한다.
<뚜벅이 이동 경로>
1) 곽지모물 > 202-1(배차간격 15~20분) > 옹포리 > 택시 > 환상숲곶자왈
2) 환상숲곶자왈 > 택시 > 애월리: 숙이네보리빵(점심)
3) 애월리 > 202-1(배차간격 15~20분) > 곽지모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