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사실 오늘은 일기가 참 쓰기 싫었다. 하루가 참 길고 고단했기 때문이다. 이미 마음의 긍정 에너지를 다 소진한 터. 일기를 쓴다한들 애써 눌렀던 짜증이 폭발하며 글이 산으로 가겠다는 생각이었다. 아이가 잠든 고요한 제주. 닫아놓은 창문 너머로 귀뚜라미 소리만 멀찍이 들릴 뿐 다른 소리는 다 묵음이다. 고요는 딴짓할 의욕마저 없애고, 결국 나를 이 곳으로 불러들였다.
감기로 인해 컨디션 난조인 아이는 평소보다 한 시간을 늦게 일어났다. 일어나서도 뒹굴뒹굴. 그래, 같이 뒹굴거리기로 했다. 게다가 밖에는 비도 내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빗소리만 들어봤던 때는 언제일까. 너무 까마득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전 내내 내릴 줄 알았던 비는 점점 잦아들었고, 작아지는 빗소리를 채울 또 다른 소리가 필요했다. 음악을 틀었다.
하이디가 엄마의 플레이리스트를 고이 들어줄 리가 없다. 트롤 OST와 씽 OST를 번갈아가면서 듣겠단다. 딱 한 곡만 엄마 노래 듣자는 부탁에도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차라리 아이 부탁을 들어주고 책을 읽겠다는 에라 모르겠다의 마음으로 아이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분명 플레이리스트 순서는 트롤 OST 쭉, 씽 OST 쭉인데 자신이 뱉은 말은 지키겠다는 심보인지 번갈아가며 골라 듣기 바쁘다.
들을 만큼 다 들었을까. 자신은 나갈 마음의 준비가 다 되었단다. 나갔으면 좋겠단다. 하루 종일 집에 있더라도 밥은 먹어야 하고 점심은 나가서 먹으려고 했던 것이 주부의 마음. 길 건너 밥집에 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옷을 갈아입던 아이는 갑자기 CU를 가야겠단다. 그래야 밥을 먹으러 가겠단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은 세븐일레븐. 왜 하필 CU일까. CU에서는 스티커북이 팔기 때문이란다.
그놈의 스티커북. 짜증이 점점 마음의 경계 밖으로 나오려 한다. 버스를 타고 가야만 하는 CU. GS25에는 있을 수도 있다는 설득으로 GS25로 향한다. 15분을 걸어 도착한 GS25. 스티커북은 없다. 버스를 타고서라도 CU에 가겠단다. 점심은 스티커북을 사야만 먹겠단다. 약도 먹어야 하는데 기침이 심해지는 것 같은데 소리를 질러야 하나.
스티커북은 그제도 샀고, 어제도 샀다. 매일매일 스티커북은 살 수 없다. 그제 산 스티커북도 색칠을 덜했고, 어제 산 스티커북도 제대로 가지고 놀지 않았다. 지금은 점심시간이다. 버스를 타고 가면 점심시간이 지나서 안된다. 5분 거리에 GS25가 하나 더 있으니 여기만 한 번 더 가보는 것으로 하자.
꽤 길었던 설득. 마지못해 아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히 협박 때문이다. 두 번을 설명해도 막무가내 고집을 부리길래 세 번째는 단호하게 말했다. 스티커북을 사면 내일 아빠가 가지고 오기로 한 선물은 없다고. 결국 스티커북 대신 음료수 하나만 사게 된 아이. 이제는 점심을 먹어야 한다.
걷고 싶지 않다고 벤치에 앉는다. 바로 앞의 피자도 싫고, 바로 옆의 불고기도 싫단다. 집 근처까지 걸어가 비빔밥을 먹재도 싫다고 한다. 그럼 무엇을 먹겠냐는 말에 엄마가 생각을 해야 한단다. 또다시 막무가내 고집. 감기 때문일 거야로 받아들이기에 아이의 짜증과 막무가내 요구는 도를 넘고 있었다.
엄마는 더 이상 생각나는 것이 없으니 하이디가 생각해야 한다. 먹고 싶은 것을 생각하면서 일단 걸어가자고 한다. 웃음기 싹 지운 단호한 말투에 아이는 엄마가 싫다는 말을 굳이 하고는 억지로 나를 따라온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걷는 내 손을 아이가 슬며시 잡는다. 미안하다며 이제는 안 그러겠단다. 퍽도 안 그러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이의 보드라운 손은 조건 없는 믿음을 보낸다.
화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다정하게 걷는 길. 갑자기 아이가 묻는다. 저거 푸드트럭이지? 그렇다고 하니 그럼 음식을 팔겠네. 점심을 먹으면 되겠단다. 비는 그쳤지만 바람은 부는데 이를 어쩌나. 바위 위에 딱 앉아서 저기서 먹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일곱살이 무슨 푸드트럭의 매력을 안다고. 무슨 바다 보며 먹는 즐거움을 안다고 무시하고 싶었지만 나 역시 너무 배가 고파 더 이상 실랑이를 할 힘이 없어 그냥 푸드트럭으로 향했다.
어쩌면 푸드트럭은 엄마에게 짜증낸게 미안했던 아이의 선택이 아닐까. 바다를 후식 삼아 맛있게 그리고 기분 좋게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번에는 버스정류장이 문제다. 버스정류장을 보더니 어린이 박물관에 가겠단다. 집으로는 안 가겠단다. 또다시 시작된 막무가내. 너는 감기에 걸렸다. 쉬었으면 좋겠다. 오늘 쉬면 내일 더 재밌게 놀 수 있다. 엄마의 갖은 말에 모두 도리도리. 억지로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국립제주박물관으로 향했다.
'어린이 올레'라고 이름 붙여진 어린이 체험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는 곳. 여행지 그림카드를 통해 아이는 이미 존재를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이에게 여행지 선택권을 주겠다는 야심 찬 계획으로 여행지 그림카드를 만들었는데 날씨나 상황에 따라 여행지가 달라지기 때문에 선택권보다는 가기 전 기대를 부풀리기 위한 용도로 쓰고 있다. 어제저녁, 오전에는 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내일은 국립제주박물관을 가겠다며 보여준 내 불찰이었다.
4시에 도착한 박물관. 폐관은 6시인데 어린이 올레는 평일은 5시에 닫는단다. 마음에 들면 몇 번이고 반복하는 하이디. 다른 친구들에게 양보하면서 자신도 또 해야 하는 상황에 생각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시간이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묻을 닫는다는 직원분의 설명에 다시 또 막무가내 고집불통으로 변신한 하이디. 어른 전시실은 보지 않겠단다.
버럭 화를 내고 싶었다. 입 바로 앞에서 화가 맴돌고 있었다. 나도 잠시 내 마음을 식혀야 했다. 다른 벤치에 각각 앉아 있는데 아이가 먼저 다가온다. 엄마 나 괴롭히려고 그런 거지. 엄마가 나 괴롭혀서 크레파스도 안사고. 그래, 어른 전시실 앞에 있던 기프트숍. 크레파스가 있었고 사주지 않겠다고 했다. 분명 나는 하이디가 갖고 싶은 물건을 매번 사준 적이 없었는데 왜 그럴까. 보는 것마다 사야 한다고 하니.
혼자서 마음을 조금 삭힌 나는 천천히 설명한다. 제주집에도 서울 집에도 크레파스가 있다고. 똑같은 물건을 다쓰지도 않았는데 또 사는 것은 나쁜 행동이라고. 엄마는 하이디를 괴롭히지 않는다고. 하이디가 엄마를 조금 속상하게 해서 따로 앉은 것뿐이라고. 그렇게 또다시 화해. 드디어 아이는 귀염 발랄 하이디로 돌아왔다.
해지는 하늘을 보며 아름답다 말하고, 같이 보자고 말하는 그런 하이디로. 알고 있다. 일곱살이 어떻게 매일매일 기분이 좋기만 하겠나. 게다가 컨디션도 나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하루 종일 아이의 짜증을 받아주는 것은 참 쉽지 않더라. 최선을 다해 애쓰며 참았던 하루. 하지만 참겠다는 의지를 어떻게든 비집고 나간 감정들이 아이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지 마음이 쓰였다.
집으로 돌아오며 아이에게 오늘 하루를 물었다. 단순하게 좋았다고 하는 아이. 속상한 일도 있지 않았으냐는 나의 말에 미안하다는 말로 답을 대신한다. 고마움으로 하루를 채워보겠다는 결심은 하루를 가지 못하고 미안함이 된다. 아이와는 분명 화해를 하고 내일은 사이좋게 지내자며 포옹을 했지만 내 마음에는 그저 마음껏 분출되지 못한 짜증이 찌꺼기처럼 남아있었다. 그래서 쓰기 싫었던 일기. 막상 다 쓰고 나니 그 찌꺼기들은 키보드의 타닥 소리와 함께 다 타버린 것 같다.
다행이다. 내게 다시 평온이 찾아와서. 혹시나 내일 또 하이디가 막무가내 고집불통으로 변신한다면 다시 한번 더 애를 쓰며 참아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제주도에서 버럭 엄마가 되지 않는 연습을 해보련다. 느긋과 여유의 제주가 적당한 연습장소가 되어줄 거다.
<일곱살 하이디의 일기>
그림설명: 어린이 올레에서 체험하는 엄마와 하이디
일기설명: 오늘은 어린이 올레 가서 체험이 재미가 있었다. 근데 좀 푸드트럭에서 밥을 먹었다. 근데 오늘은 진짜 좋았다. 너무너무 감기가 심해서 집으로 갔다. 레이지마마에서 세탁기 돌렸다.
하이디는 박물관을 나서면서부터 기분이 좋아져
저녁을 먹으러 간 식당 마당에서 자꾸만 더 놀고 싶어 했다.
김기가 심해진다고 집으로 가자고 했던 이야기를 쓴 것 같다.
집에 오자마자 세탁기도 돌렸고.
일기를 이렇게 쓰면 좋겠다 저렇게 쓰면 좋겠다
그림을 이렇게 그리면 좋겠다 저렇게 그리면 좋겠다
엄마의 조언을 가장한 잔소리는 하지 않는다.
맞춤법만 더러 알려주고 있다.
일곱살이 일기를 매일 쓰는 것 자체가 대견한 일 아닐까.
글쓰는 일을 좋아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저 지켜보면서 좋다는 격한 리액션만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자기가 쓴 글이 누군가를 즐겁게 해줄 수 있다는 것만 느껴도 충분하니까.
<뚜벅이 이동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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