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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차, 그냥 쉬다 - 레이지마마

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by 여유수집가

햇살이 방안 가득 들어온다. 바람마저 잠잠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오후. 습한 기운이 이마에 맺힌 땀과 섞여 달큰하게 끈끈하다. 몸을 살짝 돌리니 바스락 소리가 난다. 그리고 실눈을 뜬 아이와 시선이 닿는다. 배시시 나오는 웃음. 잘 잤어? 아이는 다시 눈을 감는다. 나도 아이와 마주 보며 다시 눈을 감는다.


제주에 와서 처음으로 낮잠을 잤다. 둘 다 병원에 다녀온 뒤였다. 막무가내 고집불통으로 엄마를 힘들게 했던 하이디는 결국 지난밤 기침이 심해졌다. 비염이 주된 원인이었던 약한 감기가 목감기로 변질된 촉이 왔다. 하루 분의 약이 남았음에도 다시 병원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매주 금요일은 숙소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어린이 프로그램이 있는 날이다. 오늘은 에코데이. 가까운 곽지해수욕장으로 가서 쓰레기를 줍는 환경보호활동을 한단다. 친구들과 손을 잡고 해변까지 걷는 것도 재미있겠고, 쓰레기를 줍는 활동도 의미 있겠다 싶어 꼭 참여하고 싶었는데 아이는 가기가 싫단다.


20170908_104844.jpg 택시를 타서는 아니고; 엄마랑 장난치던 순간

엄마는 욕심을 접어야 했다. 아빠와 함께 하는 주말을 위해 감기 증상을 호전시키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병원에 가니 하이디도 엄마도 목이 부었단다. 항생제가 포함된 약을 처방받고 숙소로 돌아왔다. 아이의 컨디션을 고려해 오늘은 택시로 이동했다. 사실 나 역시 어디서 내려서 몇 번으로 갈아타고 하는 신경을 쓸 의지가 없었다.


에코데이는 아직도 진행 중인지 조용한 숙소. 아이와 나는 침대에 누었다. 책을 읽어달라 역할놀이를 하자 이것저것 요구할 것이 많은 하이디여야 정상인데 조용히 쉬자는 나의 말을 순순히 듣는다. 아무 방해 요소 없이 두 모녀는 달콤한 낮잠을 잔다.


나까지 아프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심하지는 않지만. 하이디야 너무 놀아서 그렇다고 하고 나 역시 너무 놀아서일까. 늘어지게 늦잠 자고, 때로는 낮잠도 자고, 뒹굴거릴 일이 많을 줄 알았던 제주에서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살았음이 몸으로 드러난 모양이다. 늘 마음과 머릿속이 분주했던 삶, 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삶에서 마음과 머릿 속은 한가한데 몸이 분주하다 보니 나타난 부작용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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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을 잤을까. 비슷한 시간에 아이와 내가 뒤척인다. 누가 먼저 뒤척인 건지는 모르겠다. 뜨거운 햇살 아래 바람은 잠잠하고 땀이 살짝 났다. 일어나면 기운을 번쩍 차릴 것 같았던 아이도 나도 아직은 몸이 가라앉는다. 둘은 조용히 자신의 책을 찾아 읽기 시작한다. 고요함 속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만 나는 시간. 몸은 무겁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20170908_172045.jpg 다섯살 동생은 엄마랑 같이 킥보드를 타고, 그 뒤를 따라가는 하이디

4시쯤 되니 밖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하나 둘 숙소로 돌아온다. 다시 활기가 넘치는 숙소. 조용했던 아이도 창 밖으로 누가 마당에 나왔나 쳐다본다. 때마침 우리 방에 놀러 온 5살 동생. 고요함을 누렸던 모녀는 다시 활기찬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물론 목은 여전히 아프고 하이디도 기침을 계속했다. 그래도 고요를 누린 덕분인지 제주로 퇴근한 아빠를 반갑게 맞이할 수 있었다. 작은 방이지만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서.


가라앉던 몸이 점점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아쉬운 마음이 살짝 들었다. 아무 곳도 가지 않고 그냥 사라져 버린 하루가 아닐까. 벌써 절반이 지나가고 있는데. 곧바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 나 아직도 목표의식에 젖어있나 봐. 쉬는 것도 여행의 일부임을, 쉬기 위해 제주에 내려왔음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참, 사람 습관 바꾸기는 쉽지 않음을 절감하면서.




<일곱살 하이디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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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설명: 병원에 간 엄마와 하이디

일기설명: 오늘 오후에 쉬었다. 병원에 갔다. 진료하는 게 많이 많이 다행이었다. 약도 먹고 빵 사서 다음에 와야겠다. 병원 선생님들아 수고했어요! 사랑해요. 고마워요. 진료해줘서 고마워요.


병원에 들렀다 빵을 사서 집에 왔는데

다음에도 그러겠다는 말인가보다.


병원 선생님들께도 사랑해요라니!

사랑넘치는 하이디, 귀엽다~ ^^



<뚜벅이 이동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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