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4일차, 반전의 반전 - 서귀포자연휴양림, 협재해변

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by 여유수집가

#1. 아빠 VS 선물 VS 친구

어젯밤 제주도로 퇴근한 아빠는 하이디를 위한 선물을 가지고 왔다. 제주도에서 엄마 말 잘 듣고 아빠 없이도 씩씩하게 잘 놀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깜짝 선물은 아니었다. 이미 수요일에 예고가 됐다. 처음에는 어떤 선물이 갖고 싶냐는 질문에서 시작해 나중에는 협박을 위한 예고였다. 하이디가 이렇게 땡깡 부리면 아빠가 선물을 가지고 오실까라며.


하이디는 아침부터 아빠를 그리고 선물을 기다렸다. 아빠는 밤이 되어야 온다는 말에 쉽게 밤이 되면 좋겠다며 밤은 언제 되는지를 하루 종일 물었다. 밖이 깜깜해지자 아빠가 오면 어떤 표정을 하겠다는 리액션까지 내게 보여줬다. 똑똑똑. 기다리던 아빠가 왔다. 아빠랑 선물은 동급 정도는 되겠지 생각했는데 선물이 우선이었다. 아빠 얼굴을 보기보다 선물은 어딨나며 찾는다. 아빠가 서운하게 말이다.


'소피루비 말하는 소원수첩'. 얼굴에 함박미소가 떠나지를 않는다. 해보고 들여다보고 '캐리와 장난감 친구들' 놀이도 하고. 애지중지다. 너무 좋아하길래 걱정이 됐다. 내 집 네 집 없이 들락날락하는 이웃집 아이들에게 이렇게 귀한 장난감을 양보할 수 있을지. 싸움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닌지. 오늘 아침, 창 밖으로 들리는 새로운 장난감 소리를 듣고 아이들이 하나 둘 찾아온다. 하는 방법을 알려주며 선뜻 장난감을 내어주는 하이디. 아빠보다 더 반가웠던 선물을 기꺼이 내어준다. 제주가 아이 마음을 넉넉하게 만든 거다.



#2. 사랑스런 하이디 VS 구박받는 하이디

이를 유독 빨리 가는 하이디는 벌써 윗 앞니 두 개까지 빠졌다. 내게 세상에서 제일 싫은 일이 무엇이냐 물으면 하이디를 데리고 치과에 가는 것이라고 하겠다. 어쩜 그리 치과를 무서워하는지. 최근 두 번은 모두 한 번에 이를 뺀 적이 없었다. 이를 빼러 치과에 가면 울고 불고 무섭다고 몸을 빌빌 꼬아서 다음에 오기로 하고 다시 돌아갔다가 차갑게 변한 엄마 아빠를 되돌리고자 두 번째 가서야 뽑고 돌아왔다. 의사, 간호사의 끈질긴 설득도 쉬이 통하지 않았다. 화가 나서 말 한마디 걸지 않는 엄마, 아빠 모습이 해결책이었다.


오기 직전 윗 앞니 두 개를 빼고 내려왔기에 제주에서는 치과에 갈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운명은 얄궂다. 아랫니 한 개가 많이 흔들리지도 않는데 뒤에 벌써 새이가 난 거다. 목요일에 발견한 사건. 남편을 애타게 기다렸다.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지만 하이디를 데리고 치과에 함께 가줄 구원병이 필요했다. 그리고 오늘 하이디를 데리고 치과에 갔다.


몇 번을 약속했다. 울지 않고 용감하게 이를 뽑기로. 이를 뽑으면 좋아하는 스티커 북도 두 권이나 사주기로 했다. 제주에 와서 마음이 넉넉해졌다고 두려움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치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부터 주저주저하던 하이디는 진료 의자에 안기도 전에 울음이 터졌다. 결과는 병원의 진료 거부. 어린이 치과로 가야겠다는 안내를 받았다. 결국 월요일에 어린이 치과에 가게 된 하이디. 남편은 구원병이 될 수 없었다.


너무 야속하기만 한 상황. 월요일에 어떻게 치과를 데려가야 하나. 왜 제주도 치과는 끝까지 아이를 설득해주지 않을까. 아이의 마음을 먼저 들여다 봐줘야 하는데 아직 부족한 엄마인 나는 아이를 구박했다. 이미 5개의 이를 빼고도 왜 아직도 겁을 내는지. 갈 때마다 이러면 어떻게 하는지. 약속을 하고서도 왜 지키지 않는지. 아이에게 말했다. 이를 빼기 전까지 친절한 엄마는 없다고. 후회하면서도 쌀쌀한 모습을 풀기가 힘들었다.



#3. 감기 VS 피톤치드

아고 우리 딸. 하이디가 기침을 할 때마다 아빠는 말했다. 네블라이저는 왜 안 챙겨 왔을까를 아빠는 아쉬워했다. 기침이 제법 심한 하이디. 그렇다고 집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집에 있어도 들락날락하는 이웃집 아이들과 노느라 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왕 쉴 수 없다면 아빠랑 나들이가 더 좋지 않을까. 발치를 실패한 마음도 달래야 할 터. 서귀포자연휴양림으로 향했다.


한낮의 더위를 피하고, 미세먼지가 심한 무거운 공기를 조금은 희석시켜줄 선택이었다. 차로 진입이 가능한 자연휴양림으로 중간 즈음에 주차를 하고 조금만 걸으면 근사한 전망대를 만날 수 있다고도 했다. 한 달 전 읽은 책에 나오는 내용이었다. 무엇이든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서귀포자연휴양림 전망대로 검색하니 거린사슴전망대가 나온다. 매표소에서 물었다. 거린사슴전망대까지는 어떻게 가느냐고. 이 곳은 아니고 밑으로 더 내려가야 한단다. 내가 알고 있던 정보가 틀린 것일까. 그냥 걷기로 했다.


건강산책로를 따라 들어가 생태관찰로로 나오는 길, 2,2km를 걸었다. 숲이 내뿜는 피톤치드 때문일까. 하이디의 기침도 줄어든 느낌이다. 푸르른 숲이 선물하는 시원한 그늘과 상쾌한 공기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영향을 준다. 치과 진료거부 사건으로 꽁했던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이를 뽑을 때까지 역할놀이는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슬며시 무른다. 아이가 원하는 놀이를 함께 하는 친절한 엄마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하는 한마디. 뭐를 사달라고 하는 것은 이 뽑기 전까지는 절대 안 돼!


출발지로 돌아와 매표소에 다시 물었다. 휴양림에 차가 진입할 수 있는지. 가능하단다. 그래, 알고 온 정보는 정확했는데 질문이 틀린 거다. 차로 한 바퀴를 도는데 보이는 안내판, 법정악 전망대. 내가 잘못 알았던 것은 바로 전망대 이름이었다. 처음부터 정확한 정보를 알았더라면 법정악전망대도 즐기고 평상에서 편히 쉴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았다. 괜찮다. 오늘이 제주의 마지막 날은 아니니까.



#4. 도보 15분의 해변 VS 차로 20분의 해변

레이지 마마를 한달살기 숙소로 정한 큰 이유 중 하나는 도보로 해변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뚜벅이 엄마이지만 아이에게 신나는 물놀이를 만끽하게 해주고 싶었다. 처음 2주는 해만 나면 물놀이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 시작은 숙소 입주 첫날, 아빠와 함께한 물놀이였다. 바다에서 나오며 아쉽다는 하이디에게 약속을 했다. 엄마랑 또 오자고. 몇 번이고 올 수 있다고.


물놀이랑은 인연이 없나 보다. 숙소 마당에서 킥보드를 타다 팔을 다친 하이디. 아무래도 바닷물이 닿는 것은 안 되겠다 싶었다. 하이디 역시 물에 닿으면 쓰린 상처에 물놀이를 할 수 없음을 수긍했다. 걸어서 15분의 곽지해수욕장이 그저 산책하는 공간, 바라보는 공간이 돼버린 거다.


서귀포자연휴양림에서 협재해수욕장으로 향했다. 같은 제주의 바다라도 모두 조금씩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기에 선택한 협재였다. 아직은 무더운 여름 날씨. 8월 31일 자로 해수욕장 운영이 종료되었다며 안전요원이 없으니 입수를 하지 말라는 방송이 10분 단위로 흘러나왔다. 시끄럽다고 불평을 할 수는 없었다. 이 방송을 무시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바라만 보던 바다. 조금 걷기로 했다. 왜 나는 들어가면 안 되느냐는 하이디. 팔꿈치의 상처는 나아가는데 이번에는 감기다. 감기 때문이라는 말에 쉽게 체념하는 하이디가 안쓰러워 발만 담그기로 한다. 발만 담그고도 마냥 좋은 아이. 8월 말에 시작한 한달살기는 물놀이도 할 수 있는 시기라 더욱 좋다고 생각했더니 아무 소용이 없다. 아무래도 한 번 더 와야 할 운명인가 보다.



<일곱살 하이디의 일기>

아빠랑 함께 잠든 하이디는 오늘 휴재 ^^



<뚜벅이 이동 경로>

오늘은 주말아빠덕분에 뚜벅이가 아님!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3일차, 그냥 쉬다 - 레이지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