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2박3일, 3박4일, 기간이 정해진 여행은 일정이 빡빡할 수밖에 없다. 보다 많은 곳을 담고 싶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올 수 있는 제주임에도 그 마음먹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더 욕심을 내게 된다. 한달이란 기간은 묘하다. 정해진 일정이 있지만 여행을 일상으로 만들어주는 기간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일상에 젖어 여행의 기대감을 잃어버리게 하지도 않는다.
뚜벅이 신세를 면하게 되는 주말. 차로 올라갈 수 있는 오름을 가기로 했다. 군산오름이다. 군산오름에서 시작된 오늘의 일정은... 따로 계획하지 않았다. 한달살이의 여유일 수도 있고, 아이랑 제주만 열 번의 자신감일 수도 있다. 아니면 여행자보다 유랑자를 꿈꾸는 바람일 수도 있다. 첫 번째 목적지에 가면 분명 우리를 부르는 곳이 나타날 거다.
마주오는 차가 나타나면 어쩌나 불안했다. 가까스로 겨우 차 한 대가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을 오르고 오르니 탁 트인 정상이 나타났다. 주차를 하고 5분을 더 숲길로 오르면 오름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리는데 한 아저씨가 말씀하신다. "더 가지 마세요. 애도 있는데 진드기 위험하다고 하네요. 그리고 정상보다 여기가 더 전망이 좋아요."
그래도 올랐으면 정상을 밟고 싶은 욕심에 조금 더 걸어가 본다. 딱 버티고 있는 '진드기 위험' 안내판. 긴 팔, 긴 바지, 운동화를 권했다. 반팔, 반바지, 양말도 안 신은 크록스 차림. 아이 앞에서 안전불감증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아저씨의 말을 믿기로 했다. 정상보다 여기의 전망이 더 근사함을. 쉽게 정상에 대한 욕심을 포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아저씨께 감사했다. 이게 오지랖의 힘이겠지.
이번 제주에서 첫 오름이다. 사실 유명 관광지는 대부분 들렀고,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같던 곳 또 가보기이거나 오름과 올레다. 이번 제주 한달살기에서는 오름을 한 주에 하나 정도는 올라보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뚜벅이로 아이와 다니다 보니 쉽지는 않았다. 첫 오름이 된 군산오름. 좋았다. 비록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편히 오기는 했지만.
높은 곳에 서서 가만히 제주를 내려다보며 저 안에 내 정든 공간 하나 마련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한달살기를 연장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던 터라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서부권에 마련한 숙소. 생각보다 제주는 훨씬 더 넓어서 내가 좋아하는 동부권을 뚜벅이로는 갈 수가 없더라. 주말아빠랑 가기에도 시간이 아까웠고. 그 아쉬움에 동부권에서 3주 정도 더 살다 가면 어떨까 생각이 떠올랐던 것은 사실이다.
추석 연휴도 끼어있겠다. 이왕 짐 다 가지고 내려온 것 온 김에 더 머물렀다가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지만 한 달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무리 욜로라지만 갑작스레 먹는 밥은 체하는 법. 아이의 서울 친구들도, 추석에 가족들과의 만남도 또 혼자 있어야 할 남편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 제주 일상자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정해진 기간을 충분히 즐기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서울에서도 유랑자처럼 살 수 있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슬며시 생겼다.
첫 번째 목적지 군산오름은 우리를 대평리로 이끌었다. 내려다 보이는 평온한 공간 속에 스며들고 싶었다. 공영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그냥 걷기로 한다. 2년 전에 왔던 펜션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고, 자연의 신비를 어김없이 드러내던 박수기정도 변함없이 버티고 서서 우리를 환영했다. 대평의 바다는 곽지나 협재의 바다와는 또 다르다. 초록빛 다 걷어낸 짙은 푸른빛으로 우리를 반긴다. 거기에 부서지는 햇빛! 뜨거운 햇살에도 계속 걷고만 싶다.
바다를 따라 걷다 우연히 만난 작은 카페, 쓰담쓰담. 해녀 탈의실 위층에 자리 잡은 것부터 범상치 않더니 귀한 선물 같은 공간이었다. 아기자기한 수공예품이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다와 함께 이야기를 건넨다. 창문 곳곳, 벽 하나하나 작은 공간 놓침 없이 제주를 담았다. 손님도 거의 없어 조용한 공간. 너무 예쁜데 장사는 될까 싶었는데 월정리에 2호점을 내셨단다. 또 한 번 육지의 기준이 틀렸음을 알려준다.
낭만해녀 이야기 4: 해녀와 팅커벨 2
바다에서 혼자 작업을 하다 보면 가끔 외롭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오늘은 녀석이 있어 든든하고 위안이 되었다. 한 번은 녀석이 없어져 찾아보니 바다로 다시 떨어졌다. 녀석을 조심스레 테왁에 다시 올리고 물기를 살살 털어줬다. 어느새 날개를 다 말린 녀석이 슬슬 발동을 걸더니 다시 하늘로 날아갔다. 오늘 내가 널 살렸구나. 아니, 네가 날 살린 건지도 모르겠다.
해녀 원석 팔지 포장 뒷면에 적힌 이야기다. 작은 물건 하나에도 이야기가 담겼다. 이야기 하나에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팔지가 특별해지고, 신비해진다. 인생도 같을 거다. 나만의 이야기를 어떻게 담느냐가 인생의 의미를 다르게 만들어 줄 거다. 어쩌면 이렇게 일기를 쓰는 것도 내 인생에 이야기를 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우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신앙의 증인, 정난주 마리아의 묘'를 만났다. 천주교 박해를 알리고자 했던 남편 황사영이 대역죄인으로 체포되고 능지처참을 당하자 정난주 마리아는 귀양 길에 올랐다. 두 살 난 아들을 품에 안은 채였다. 하지만 정 마리아는 제주도, 아들은 추자도가 귀양지였다. 생이별!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그녀는 짐작할 수도 없는 절절한 슬픔을 신앙으로 이겨내고,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기도했다. 내 삶에도 세 속의 기준보다 의미의 기준이 우선하기를. 물질적 욕심보다 정신적 위안이 우선하기를. 나만을 위함보다 함께 위할 수 있기를. 지금 제주에서 느끼고 있는 것들을 보다 오래 간직하고 실천할 수 있기를. 주님의 평화 안에 머물 수 있기를... 참 신기하다. 때론 우연한 만남이 더 큰 울림을 준다. 그래서 인생이 신비한 것이겠지.
<일곱살 하이디의 일기>
아빠랑 헤어진 하이디는 너무 피곤해서 일기를 쓸 수 없다고 했다.
몸이 피곤한건지 마음이 피곤한건지.
아무 것도 하기 싫은 이별의 후유증을 이야하기로 했다.
그래서 오늘도 휴재! ^^
<뚜벅이 이동 경로>
오늘은 주말아빠덕분에 뚜벅이가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