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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차, 일상과 여행은 한 끗 차이 - 노형

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by 여유수집가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여행보다는 밖에서 말려야 뽀송하게 마르는 빨래 때문에 날씨에 더 민감한 나날이다.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빨래도 하지 않고는 비를 기다렸다. 비가 내리고 나면 흐릿한 공기도 꿉꿉한 습도도 해소될 것 같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주의 비는 그냥 내리지 않았다. 거센 바람과 함께였다. 두두둑 두두둑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 창 밖을 내다보니 나무가 무섭게 흔들린다. 말로만 듣던 제주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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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을 앞세워 해를 가린 하늘.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아직 8시다. 옆에서 아이는 자고 있다. 항상 먼저 일어나 엄마를 깨우는 하이디인데 감기 때문인지 어두운 하늘 때문인지 늦잠이다. 덕분에 나도 같이 늘어진다. 9시가 다 되어서야 우리의 아침은 시작됐다. 아침을 다 먹자마자 하이디는 친구를 찾는다. 비는 잦아들었지만 여전한 바람에 마당은 텅 비어있다. 그래도 나가겠다는 아이의 고집에 비옷을 입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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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당을 첫 번째로 접수한 친구는 하이디. 모두 창 밖만 보고 있었을까. 아이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한다. 친구가 말했다. 제주도는 부러운데 독박육아는 싫다. 단호한 나의 대답. 독박육아는 아니야. 숙소에 머무르는 시간 대부분은 친구와 우르르 몰려다니며 노는 하이디다. 마당에서 술래잡기도 하고, 킥보드를 타기도 하고, 집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인형놀이를 하기도 한다.


유치원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오고, 공동육아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도 엄마랑 함께였다. 엄마 없이 혼자 뛰어 친구 집에 놀러 가 본 경험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르다. "엄마, 갔다 올게!" 한 마디를 남기고 바람처럼 나간다. 지금도 하이디는 다른 친구 집에 놀러 갔고, 우리 집에는 주인도 없는데 7살 남자아이 한 명이 하이디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다.


오전부터 집을 나서려는 계획이었다. 소아과에 갔다가, 점심을 먹고, 어린이 치과에 갔다가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비도 오락가락, 게다가 거센 바람에 하이디는 친구들과 노느라 바쁘다. 다시 우르르 몰려와 우리 원룸에 6명 아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놀고 있다. 조용한 시간이 아쉽기도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내가 하이디를 상대하며 역할놀이를 하지 않고, 내 책을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우니까.


어린이 치과의 첫 진료는 예약이 안된단다. 두 시까지 와서 한 시간을 더 기다리라고 했다. 집에서 점심까지 먹고, 두 시에 맞춰 치과를 찾았다. 토요일과 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어쩌나. 마음을 졸인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서일까. 아이는 빨리 자신의 차례가 되면 좋겠단다.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하이디의 이름이 불렸다. 침대에 누우며 아이는 또 울먹거리기 시작한다.


드디어 발휘되는 의사, 간호사 선생님의 내공. 의사 선생님은 하이디에게 '후' 소리를 내봐라, '하' 소리를 내봐라. 이 것 저 것 시키면서 아이의 정신을 딴 곳으로 이끌더니 마취를 끝낸다. 따끔한 마취에 또 울기 시작하는 하이디. 이번에는 간호사다. 입 속의 벌레들이 잠을 자야 방해 없이 이를 뽑을 수 있는데 하이디의 울음소리에 깨버린단다. 솔깃한 벌레 이야기로 아이의 울음을 잠재운다. 그리고 이 뽑기 성공!


이보다 더 의기양양할 수 없다. "나 잘했지? 용감하지?" 절로 으쓱으쓱이다. 그동안의 긴장을 다 내려놓았는지 이보다 더 명랑할 수 없다. 나 역시 마음의 짐이 쑥~ 하고 내려가니 신이 난다. 깝깝하게 길었던 하이디의 앞 머리도 자르고, 소아과도 가고, 근처 맛있는 빵집도 들러 계획된 모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돌아온 집에는 아이들이 하이디를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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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서 킥보드를 타겠다는 하이디를 두고, 집으로 올라간 나는 이내 곧 다시 마당에 선다. 구름 사이를 비집고 은은하면서도 강렬하게 존재를 드러내는 노을이 창 밖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병원에 다녀오느라 번화한 도심에서 보낸 오후. 집에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고, 청소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상의 일보다 노을이 우선한다. 이건 내가 여행을 하고 있어서일까.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마음에 달린 것이 아닐까. 어쩌면 여행과 일상은 한 끗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일곱살 하이디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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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설명: 토이저러스에서 페어리루 장난감을 고른 하이디와 너무 오래 장난감을 구경하는 하이디를 붙잡으며 화내는 엄마

일기설명: (제목 옆에 보면 '친구=엄마'라고 되어있음) 안녕 친구, 내 말 들려? 오늘 토이저러스에서 페어리루 샀어. 예쁘지? 사랑해, 친구야. 라시 동네에서 놀러와! 고마워.



택시를 타고 치과로 가는 길,

롯데마트를 지나치는데 토이저러스 간판은 왜 그렇게 눈에 잘 들어오는지.

하이디는 토이저러스에 가고 싶다고 중얼거린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이를 용감하게 뽑으면 토이저러스에 가겠다고 공약을 해버린 엄마.


너무 신난 하이디는 한 시간 반 가량을 토이저러스에 머물렀다.

이제는 그만 고르고 가자는 내 단.호.한 말이 화를 내는 것으로 들렸나 보다;

그림을 보고 당황했다는;;;


일기를 읽고 '라시 동네'가 어디냐고 물으니 '놀이터도 있고 나무도 있는 동네'란다.

그런데 어떻게 친구를 엄마로 생각하며 일기를 편지로 쓸 생각을 했을까?

기특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아무래도 제주에서 매일 일기 쓰기를 시킨 것은 참 잘 한 선택인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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