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손에 닿을 듯 닿지 않아 감탄을 하면서도 무엇인가 아쉬웠던 어제의 일몰. 오늘은 기필코 손에 닿을 듯 가까운 곳에서 일몰을 누리겠다는 결심을 했다. 보통 9시 무렵 아이와 집을 나서 다시 돌아오면 3~4시. 오늘은 조금 늦게 집을 나서기로 한다. 아이 역시 이곳 친구들에게 푹 빠져 일찍 나가는 것을 반기지도 않았다. 그래, 오전 내내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점심까지 먹고 나서자.
오늘은 마당이 아닌 좁은 우리 집 원룸에 터를 잡았다. 독서파, 말하는 소원 수첩 장난감 파로 나뉜 아이들 소리가 집 안에 가득하다. 아이들 소리에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멀리했던 TV를 보기로 한다. 물론 이어폰을 이용해 스마트폰으로. 엄마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SBS 스페셜, '사교육 딜레마' 내용이 궁금해서였다. 영상과 아이들 모습이 계속 교차한다.
제주도에 한 달을 살러간다고 할 때 부럽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꼭 한마디를 덧붙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준비는 어떻게 할 거냐, 교재 같은 것은 가지고 갈 거냐였다. 글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이도 나도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유일했다. 많이 보고, 많이 체험해야겠다는 목표도 없었다. 느릿하게 사는 법을 나부터 그리고 아이도 배웠으면 했다.
나는 아이가 성공해서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냥 행복했으면 좋겠다. 순간순간을 여유 있게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바쁜 상황을 만나도 순간의 여유를 놓치지 않고,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는 그런 단단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행복한 순간을 아이에게 많이 보여주고, 함께 행복한 순간을 많이 만들고 싶다. 행복한 일은 매일 있음을 자연스레 아이가 알았으면 좋겠다.
물론 유치원생을 키우고 있으니 여유 있는 말이 절로 나온다. 자식이 공부 못해봐라 여유가 생기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또 반대로 그래도 된다는 선배들도 있다. 얼마 전 선배의 딸이 쓴 입사지원서를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됐다. '부모님께서 늘 제가 행복한지를 궁금해하셨습니다.'라는 구절이 잊히지 않는다. 미래가 아닌 현재의 행복을 물어줄 수 있는 부모가 된다면 내 바람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엄마의 행복이 하이디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일몰을 찾아 떠나기로 한다. 월령리 선인장 마을을 산책한 후 해거름 공원에서 일몰을 보는 것이 오늘의 계획이다. 아이에게 여행 그림 카드를 보여주니 월령리에 가면 카드 속 그림을 찾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같이 찾아보자며 미션 카드를 추가로 만든다. 산책을 혹여 지루해할지도 모를 하이디를 위한 묘수였다.
하이디는 미션을 달성하기 위해 의욕적이다. 버스를 타면서도 "월령리 가요!" 큰 소리로 말하고, 그림은 어디에 있느냐며 씩씩하게 앞장선다. 의욕이 앞서면 지치는 것도 빠름을 간과했다. 생각보다 빨리 벽화가 나타나지 않자 돌변한 하이디는 이제 앉아서 책을 읽어야겠단다. 왜 하필 학습만화책인 WHY를 들고 온 건지. 자기는 엄지를 하고 나머지 역할은 다 나보고 하란다. 학습만화라서 대사도 많다. 두 챕터를 읽어야 가겠다는데 대충 읽지도 못하게 한다. 역할별로 목소리가 달라야 한단다.
목소리를 다르게 제대로 한 챕터만 읽기로 했는데 읽을 때는 좋아하더니 일어나자마자 기분이 바뀐다. 벽화를 보고도 시큰둥. 사진을 찍으면 "찍지 마!" 소리 지르기. 엄마가 싫다며 달리기. 오늘은 나도 못 참겠다. 같이 화를 낸다. 왜 엄마가 싫은지 이야기를 해라. 말하지 않으면 엄마는 모른다. 미션은 하겠다면서 사진을 안 찍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냐. 밖에서 계속 책만 읽어야 하겠냐. 그리고 WHY는 읽어주기 싫다.
늘 이해하며 차분차분 말을 하려 노력했었는데 같이 화를 내니 아이는 주눅이 든다. 이래서는 일몰까지 버틸 수가 없겠다 싶어 카페로 간다. 짜증에는 단 것이 필요한 법, 딸기주스를 마신 아이는 미안했던 모양인지 애교 모드다. 다행이다. 이대로면 일몰까지 가능하겠다. 먼저는 선인장 산책길이다. 제주 한달살기에서 꼭 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아이랑 올레길 걷기였다. 코스 완주를 기대한 것은 아니고 조금씩이라도 걷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 올레 14코스의 일부를 걸었다.
거센 바람이 머리를 헝클고, 그 바람이 풍차를 돌리며 파도를 깨운다. 여기에 검은 바위 위 그림처럼 얹힌 초록빛 선인장이 이 길을 신비의 길로 만든다. 잘 왔다. 아름답다. 근사하다. 온갖 감탄사들을 마음속으로 되뇌며 입으로는 프리파라 놀이를 한다. 들어갈 수 없는 바다가 아이에게 얼마나 큰 매력이 있으랴. 하지만 선인장은 조금 다른가보다. 프리파라 놀이에 선인장이 등장한다. "슈엘, 눈사람처럼 생긴 것 봤니? 저게 선인장이래."
보통의 여행객들은 달달 카페 앞에 주차를 하고, 선인장 산책길을 먼저 걸은 뒤 벽화가 있는 무명천 할머니 길을 걷는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반대로 걸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여기서 여행을 마친다. 반대인 우리는 해거름 공원까지 가기로 한다. 막 지나간 버스는 25분 뒤에 온다고 하고, 걸으면 20분이 걸리는 거리. 기다림 대신 걷기를 택한다. 하이디의 유혹 책은 트롤 OST. 음악을 들으며 걷는 길에는 짜증 대신 흥과 춤이 함께다.
하이디는 계속 흥이 나는데 내가 다리가 슬슬 아플 무렵 해거름 공원에 도착했다. 하이디는 바로 놀이터로 직행. 제법 규모가 큰 놀이터에 신이 났다. 그 사이 나는 벤치에 앉아 다리를 쉰다. 이제 일몰까지는 40분이 남았다. 놀이터에서 30분을 신나게 논 아이는 그림을 그리겠단다. 일몰이 더 잘 보이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아이는 그림에 나는 풍경에 빠진다.
드디어 해가 진다. 하늘이 그리고 바다가 붉어진다. 풍차의 바람이 다가오지 마라 다가오지 마라 밀어도 해는 바다로 바다로 내려온다. 하루 종일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듯 붉은 얼굴로 고이고이 바다를 물들인다. 너무 아름다우면 마음이 먹먹해진다. 기쁨보다 어쩌면 슬픔이 더 앞서는 감정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 내가, 여기 제주에서 이 순간을 보고 있음이 행복했다.
행복은 내게 한 번 더 기회를 준다. 바닷속으로 쏙 들어갈 것이라며 하이디와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해는 야속하게도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갑자기 허탈하다. 기대를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인가 보다. 하이디도 아쉽단다. 하지만 괜찮다. 내일은 날이 더 좋다고 했다. 한 번 더 바라보면 된다. 오늘의 아쉬움이 내일의 행복을 더 극적으로 만들어주겠지. 하이디도 말한다. "내일은 바다로 쏙 들어가겠지? 보고 싶다."
<일곱살 하이디의 일기>
그림설명: 가시 있는 눈사람인 선인장 모습과 월령리 선인장 마을을 산책하는 하이디와 엄마
일기설명: 비비비 제비 소리에 소리 질렀다. 오늘 밤에 즐거웠는데 마음이 쪼개지고 있어서 슬프다. 엄마가 싫다. 난 이제 떠나야겠다. 엄마가 친구들 싸울 때 소리를 질러서 싫다.
남자아이들 4명이 우리 집에서 놀다가
때리면서 싸우길래 소리를 질렀다. "동생을 때리면 어떻게 해!"
이때 밖에서 놀던 하이디가 집으로 들어왔다.
싸운 이유를 듣고, 그러면 안된다고 사과를 시키고, 오늘은 그만 놀자며 돌려보냈다.
그 모습을 본 하이디는 속상했던 모양이다.
일기를 보고서야 하이디의 마음을 알았다.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엄마가 소리를 질렀던 거라며 설명했지만
그래도 소리를 지르는 것은 싫단다.
월령리에서도 집에서도 오늘은 무서운 엄마가 돼버린 것만 같다.
그래도 하이디에게 말했다.
엄마는 때리는 친구들이 있으면 소리를 지를 거라고. 그건 절대 안 되는 거라고.
<뚜벅이 이동 경로>
1) 레이지마마(곽지모물) > 202(배차간격 15~20분) *202-1과 202-2가 통합됨 > 월령리
2) 월령리 > 도보 > 해거름 공원
3) 해거름 공원 > 택시 > 곽지해수욕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