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일어나자마자 허겁지겁 블라인드를 올렸다. 쨍한 하늘, 어제보다 더 좋은 날씨! 콧노래가 나온다. 아무래도 오늘은 제대로 된 일몰을 보게 될 모양이다. 오늘 일몰 포인트는 한담공원, 그 전에는 '제주현대미술관'을 찾기로 했다. 어젯밤 제주 지도를 펼쳐 놓고 하이디가 직접 고른 여행지였다. 3시에 지선버스에 갈아탈 계획으로 집을 나섰다.
2시 50분 환승정류장에 도착했다. 10분만 기다리면 될 줄 알았는데 이런! 제주버스정보 앱이 틀렸다. 정류장에 붙은 버스 시간 안내표를 보니 3시 20분에 버스가 온단다. 오늘은 장날도 아닌데 버스 정류장 의자는 이미 할머니들로 꽉 차 있다. 하이디마저 서서 기다려야 하는 상황. 내가 잘못 봤던 걸까. 다시 한번 앱을 켜보지만 앱이 틀렸다. 이렇게 허탈할 수가.
택시를 탈까 망설이다 그냥 버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어리둥절 당황하다 이미 10분이 흘렀고 20분 정도는 기다릴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드디어 버스가 왔다. 의자에 색색 커버가 씌워진 처음 보는 버스. 하이디는 핑크 의자에 앉아 기분이 좋다. 틀린 정보가 미안했던지 일곱살의 취향을 저격한다. 드디어 목적지 도착. 하이디는 펄럭이는 깃발 아래를 신나게 뛰어간다. 그림 그리는 곳을 찾겠다면서.
처음에는 하이디 말의 의미를 몰랐다. 그림 그리는 곳은 어디를 말하는 걸까. 같이 찾아보기로 하고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제주비엔날레 2017 투어리즘'이 진행되고 있었다. '관광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왜 관광을 할까, 지속 가능한 관광이란 무엇일까' 등의 주제를 담았다고 했다. 영상 전시들이 많아 찬찬히 보고, 듣고 싶었다. 하지만 일곱살에게는 버거운 일, 자꾸만 앞서 간다.
조용해야 해, 뛰지 마, 만지면 안 되는 거야. 잔소리를 거듭하는 상황에 주눅이 든 아이와 한 영상 전시를 보고 있는데 할머니 관람객 두 분이 계속 수다를 떠신다. 누구네 아들은, 누구네 딸은. 영상에서 나오는 인터뷰 멘트를 다 삼켜버리는 수다에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조용하시면 좋겠다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는데 하이디는 엄마가 무서워졌다고 한다. 내 신경질이 아이에게도 전해진 거다.
포기하기로 했다. 전시를 보겠다는 욕심이 나도 아이도 힘들게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이가 선택해서 온 곳이니 아이의 보폭을 존중해주는 것이 맞겠다 싶었다. 아이의 기억 속에 이 곳이 엄마의 신경질로 기억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속독 중에서 아주 빠른 속독처럼 내부 전시 관람을 마치고 야외 전시장으로 나왔다. 하이디는 또 한 번 묻는다. "그림 그리는 곳은 어디야?"
그제야 나는 하이디의 말을 이해했다. 하이디는 제주도립미술관과 제주현대미술관을 헷갈린 거다. 올해 초 들렀던 제주도립미술관에서는 그림 그리기 체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이디는 즐겁게 그림을 그려 벽에 붙이고 왔고. 그 기억으로 다시 미술관을 찾았던 것인데 장소가 다른 거다. 찬찬히 설명했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은 하이디는 무적의 짜증쟁이가 된다.
오전 내내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나선 길, 버스도 30분을 서서 기다렸고, 전시관도 둘러봤고 피곤한 상황에서 자신이 원하는 공간도 없으니 그 짜증이 이해가 됐다. 그렇다고 전부 다 받아줄 수는 없었다. 아무리 야외 전시장이고, 사람도 몇몇 밖에 없었지만 지켜야 할 에티켓이 있는 거다. 더 크게 프리파라 OST를 틀어달라는데 들어줄 수는 없었다.
급기야 전시장 한켠에 있는 카페에 가겠단다. 카페에 갔다 야외 전시장을 둘러보겠단다. 이제 막 본관의 관람을 마친 상황, 시간은 4시 30분. 분관도 보고 근처의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까지 들리려면 마음이 바빴다. 설득을 하려다 포기했다. 분관을 간들,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을 간들 아이는 내 보폭을 따라주지 않을 거고 나는 또 아쉬움만 잔뜩 남길 테니 다음에 또 오겠노라 생각했다.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아이는 핫초코를 마신다. "아까는 달콤한 것이 먹고 싶어 기분이 안 좋았는데 지금은 기분이 좋아졌어. 우리 엄마 덕분이야." 그래, 내가 마음을 비우니 아이는 내게 사랑고백을 들려준다. 아이가 조금 더 자라 미술 작품을 즐길 수 있게 되면 그때 다시 오지 뭐. 그리고 이야기해주면 되지 뭐. 일곱살때 너는 여기서 이랬단다.
핫초코 덕분에 야외 전시장을 재미있게 둘러본 우리는 분관도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도 다 내려놓고, 한담공원으로 향했다. 하루에 카페 두 곳은 사치였지만 일곱살과 함께 일몰까지 기다리기 위해서는 카페만 한 곳도 없었기에 '지금 이 순간'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바다를 내려다보는 위치, 일몰을 위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카약까지 하나의 그림이 됐다.
책을 보다 책을 읽어달라고 하다 장난을 치다 짜증도 내다 바다와 해의 만남에는 관심도 없던 아이가 점점 하늘이 붉어지니 말을 멈춘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하이디의 마음에도 닿은 거다. 말없이 해가 바다로 잠겨 드는 모습을 본다. 바다 너머 사라지는 해를 보면 슬플 줄 알았는데 아니다. 고귀하다는 마음이다. 자신을 희생한다는 생각 때문도 아니다. 무한한 사랑만이 마음을 채운다.
자연의 신비는 모두의 마음을 무장해제한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고, 사진을 찍는 서로의 시간을 기꺼이 기다려 준다. 찍지마를 외치던 일곱살도 흔쾌히 사진을 허락한다. 어둠이 내려앉는 바닷길 산책도 당연히 좋단다. 함께 기분이 좋아진 나도 바닷물에 손과 발을 담그겠다는 하이디에게 무한 긍정이 된다.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자라야 한다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일곱살 하이디의 일기>
그림설명: 제주현대미술관으로 들어가는 하이디와 엄마
일기설명: 오늘은 자동 그림 봤다. 너무 엄마가 싫다. 조랑말카페에서 책 반납 싫은데 반납을 해야 된다. 책도 못 빌려오게 해 주고.
이제 내가 늘 곁에 있는 것이 익숙해져 버린 것일까.
하이디가 내게 짜증을 부리는 순간이 늘고 있다.
책을 좋아하는 하이디는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자기 전에 꼭 책을 읽어야 하고,
그 책들을 레이지마마 안에 있는 작은 도서관, '조랑말카페'에서 빌려온다.
얼마 전부터 책을 반납은 하지 않고 빌려오기만 해서
반납해야 빌려올 수 있다고 잔소리를 했더니 대번에 일기에 써버 린다.
요 녀석! 그래도 엄마는 물러설 수 없다. 선반납 후대여 원칙은 고수할 테다!
<뚜벅이 이동 경로>
1) 레이지마마(곽지모물) > 202(배차간격 15~20분) > 784-1(배차간격 1시간) > 제주현대미술관
* 처음에는 785번을 타고 가려고 했으나, 785번 배차 시간 안내가 앱에서 틀려 784-1 탑승
2) 제주현대미술관 > 택시 > 한담공원 > 도보 > 레이지마마(곽지모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