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잘 자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일어나 내게 말을 건다. 잠꼬대인가 고개를 들었는데 미안하단다. 뭐가 미안할까. 팔꿈치 상처의 딱지를 떼서 미안하단다.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고 자라고 했다. 미안해. 하이디가 참 자주 하는 말이다. "모기 물린 곳 긁었네. 긁지 마." "미안해." "더운데, 머리 왜 풀었어?" "미안해." 그저 내가 당부하는 상황에도 그저 내가 물어보는 상황에도 아이는 미안해라고 한다.
저녁부터 콧물을 계속 삼키는 것이 심상치 않았는데 아침이 되니 재채기까지 나온다. 아직도 많이 남은 일정에 무엇보다 중요한 컨디션 관리. 계획했던 일정은 뒤로 미루고 가장 먼저 소아과에 가기로 했다. 버스로 10분이면 가는 의원과 40분이 걸리는 소아과. 가까운 곳이 아이에게는 더 좋지 않을까를 고민했지만 소아과 의사 선생님께서 소아 이비인후과 전공이시라는 검색 결과에 소아과로 마음을 굳혔다. 분명 감기보다 환절기의 비염이 더 큰 원인 이리라는 짐작 때문이었다.
배차 간격이 잦은 간선버스와 간선버스로의 이동.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다음 버스를 탈 수 있어서 생각보다 편하게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감기가 심한 것은 아니고 주된 원인은 비염 때문이라는 선생님의 진단. 약을 처방받으니 마음이 든든했다. 심하지 않은 감기를 초반에 떨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려 했건만 하이디는 극구 반대다. 다른 곳을 가야 한단다. 글쎄, 어디를 가야 할까.
몸의 움직임이 많지 않은 도서관으로 마음을 굳혔다. 병원에서 가기 수월한 설문대어린이도서관으로 향한다. 생각해보면 아이와 책을 보기 위해 도서관을 찾은 적은 딱 한 번이었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어린이 도서관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집에서 유치원에서 이미 책 보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이기에 밖에서까지 책을 봐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고, 정적인 아이에게 동적인 공간이 더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기도 했다.
도서관은 아담하고 예뻤다. 작은 공간은 알뜰하게 아이들이 호기심을 가질 수 있도로 꾸며져 있었다. 하이디 역시 오르락내리락 들락날락하며 책보다는 공간을 구경하기에 바빴다. 엄마가 읽어준다고 해도 싫다며 혼자서 세 권을 읽었을까. 이제는 다른 곳에 가야겠다는 하이디. 더 머무르자고 아이를 설득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도서관에 올 때부터 아무리 감기가 초기래도 바이러스를 괜스레 뿌리고 다니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쓰인터였다.
그렇다고 다른 관광지로의 이동은 금물. 도서관이 위치하고 있는 삼무공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제주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실물 기차가 전시되어있는 공원. 물론 아이는 기차보다는 놀이터였지만. 자꾸 놀이터에 본부를 만들고 내게 임무를 주는 하이디. 미끄럼틀 위로 올라오란다. 어린이보다 유아에게 더 적합해 보이는 미끄럼틀에 어떻게 올라갈까. 어른은 올라갈 수 없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컨디션이 나빠서 그런 거다 이해해보려 애를 쓴다.
결국 내가 놀이터에 올라가는 것은 포기. 구출 놀이를 어떻게든 하기 위해 하이디는 말한다. "엄마가 하자는 대로 할게." 처음에는 점심 먹으러 가자는 나의 부탁을 들어주는 줄 알고 신이 나서 벤치에 놓아둔 가방을 어깨에 메었다. 하지만 그 뜻이 아니었다. 벤치를 내 본부로 하겠다는 의미였다. 구출 놀이를 해야만 이 곳을 떠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라바파크의 대장, 뿌숑. 하이디는 위기에 처한 라바파크 친구인 요르정. 놀이터와 기차를 넘나들며 구출 놀이를 한다. 마음속의 숫자 10번. 아이와 역할을 바꿔가며 8번을 채우고는 이야기한다. 이제 딱 두 번만 더하고 밥 먹으러 가자. 리얼한 엄마의 역할 연기에 만족했음인지 하이디도 순순히 내 말을 따른다.
점심을 다 먹을 무렵 아이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다른 곳 어디 갈 거야. 제주가 너무 일상인 것처럼 보낸 오전. 여행객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바다가 보이는 카페를 가볼까 망설이는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집으로 바로 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번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난 엄마이기에 집으로 가자고 먼저 아이를 설득해본다. 물론 하이디의 대답은 안돼. 그래, 그럼 맛있는 케이크가 있는 카페로 가자고 한다.
택시를 타고 카페까지 이동. 약 기운 때문인지 아이는 잠이 들었다. 살짝 아이를 깨워 물었다. 집으로 갈까. 아이는 잠결에도 카페에 가겠단다. 약속을 지키는 엄마는 처음 행선지 그대로 카페로 간다. 하루 종일 컨디션 난조. 하루 종일 사진을 그렇게도 찍지 말라던 아이. 생각해보니 나 역시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미안해, 아빠에게 보내주려고. 미안해, 하이디가 너무 예뻐서. 미안해, 제주도가 너무 좋잖아.
카페에서도 여전히 사진 찍는 것을 거부하더니 갑자기 마음을 바꾼다. 아무래도 잠이 완전히 깨면서 컨디션이 조금 나아진 모양이다. 이때부터 다시 또 에너지 풀장착 모드. 음성 키보드 재미에 빠져 카톡으로 무수한 말을 보낸다. 사랑해. 알라뷰. 오늘 기분은 좋아. 그 사이 나는 바다에 시선을 보낸다.
참 신기하다. 같은 바다도 다 물빛이 다르다. 세화해변은 초록빛으로 기억되는데 애월의 바다는 푸른빛이 더 짙은 청록빛이다. 거기에 지평선으로 갈수록 그 물빛은 점점 짙어진다. 파도소리도 고민이 된다. 저 소리는 철석철썩이 맞을까, 쏴아쏴아가 맞을까. 자연의 색과 소리는 언어밖에 있고, 나는 언어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이의 저 까르르 웃음소리는 까르르가 맞을까. 더 투명한 밝음을 더 보태서 표현할 수는 없을까.
때마침 남편에게 카톡이 온다. 무슨 일로 오늘은 조용하냔다. 매일매일 이동 동선을 알려주고, 하이디의 사진을 보냈던 내가 오늘은 아무 소식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병원에 다녀왔다는 상황 보고. 남편은 장하다고 한다. 37살, 7살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아이 병원 데리고 갔다 온 것이 장하다니. 그런데 나 역시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어렵고 힘든 것은 모두 남편 몫으로 육아를 해왔던 나. 병원을 데려가는 것 역시 남편 혼자 가거나 같이 가거나의 선택이 대부분인 일상이었다.
오늘이면 11일차. 아이가 이렇게 긴 시간 놀아본 적이 있었던가. 아이의 감기는 너무 열심히 놀았기 때문이리라. 엄마와 같이 놀고, 집에 돌아오면 또 이웃집 친구들과 놀고. 쉼 없이 몸을 쓰며 노는 아이. 처음 맞이하는 환경에 몸이 놀란 탓일 게다. 미안했다. 주말에 열심히 놀아주는 엄마로는 최선을 다했을지 모르나 어렵고 힘든 상황은 남편의 몫으로 돌렸던 나. 미안했다. 늘 미안했던 엄마라서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 나오는 아이로 키운 것은 아닌지. 아이가 느끼는 미안하다는 말의 무게가 궁금해진다.
"모기 물린 곳 긁었네. 긁지 마." "알려줘서 고마워." "더운데, 머리 왜 풀었어?" "걱정해줘서 고마워."미안함보다는 고맙다는 말을 더 자주 할 수 있는 아이로 키울 수 있도록 나 먼저 고마움을 먼저 느끼는 엄마 그리고 아내가 되리라 다짐해본다. 그래, 그래서 생각한다. 저녁 8시가 다 되어 내리기 시작한 거센 비. 왜 하필 비야 대신 저녁이 되어 내려서 고맙다고, 빗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일곱살 하이디의 일기>
그림설명: 삼무공원 놀이터에서 하이디와 엄마. (미끄럼틀과 그네)
일기설명: 놀이터에 갔다. 도서관도 가서 기분이 좋다. 아빠가 소피루비 말하는 소원수첩 갖다 주셨다. 너무 좋아서 소피루비 소원수첩에서 스티커 떼는 것 없다. 그건 기분이 좋고 신난다. 오늘에 미션이다. 근데 목욕은 싫다.
아빠가 금요일 제주에 올 때 '소피루비 말하는 소원수첩'을 선물로 사다주기로 한 이야기다.
처음에 어떤 선물이 받고 싶냐는 말에
하남 스타필드 토이킹덤에서 비싸서 못 샀던 페어리루 앨범이 갖고 싶단다.
하지만 품절. 대신 정한 선물이 소원수첩이다.
하이디가 좋아하는 스티커가 소원수첩에는 없는데 괜찮냐고 물었던 말도 잊지 않고 적은 거다.
<뚜벅이 이동 경로>
1) 곽지모물 > 202-1(배차간격 15~20분) > 큰구릉내 > 355-1(6대의 버스가 우령마을로 감)
> 우령마을입구: 참사랑소아과
2) 우령마을입구 > 355-3 (8대의 버스가 삼무공원으로 감) > 삼무공원
3) 삼무공원 > 택시 > 호박다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