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제주에서 내가 읽고 있는 책은 '당신에게, 파리'다. 여행기의 정석이라는 지인의 추천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읽는 다른 여행지의 이야기. 파리와 제주는 전혀 다른 공간이지만 여행자가 느끼는 감정선은 비슷한 부분이 많아 파리를 읽으며 제주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오늘의 계획은 옆 집 사람들과 같이 협재해변으로 모래놀이를 가는 것이었다. 2살부터 7살까지의 아이들. 이른 아침 출발은 쉽지 않았고, 흐린 날씨다보니 조금이라도 더 더운 한낮을 택하기로 했다. 오늘도 여전히 일찍 일어난 하이디 덕분에 텅 비어있는 오전. 집 근처 카페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효리네 민박에 나와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는 한담해안산책로의 가운데 지점에 위치한 카페, '지금 이 순간'. 벚꽃을 보러 왔던 올해 4월의 제주에서 이미 들린 적이 있던 곳이었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시간이요 넘치는 것은 여유니 못해도 한 시간은 머무르리라 생각하고 찾아갔다. 집에서 20 여분을 걸어서.
지난번과 같은 자리에 앉아 이제는 여름 바다를 본다. 그때는 보지 못했던 카약 체험이 한창이다. 나와 아이는 같이 챙겨간 책을 읽는다. 너무 빨리 끝나버린 아이의 독서. 나의 시간을 벌기 위해 핸드폰을 넘겨준다. 요즘 카카오톡으로 이모티콘을 보내는 것에 빠져있는 하이디. 이모티콘 놀이를 하다 갤러리를 본다.
유튜브는 아니니 괜찮다. 이모티콘을 고르고 그 흉내를 내고 있으니 표현놀이다. 갤러리를 보는 것은 추억 곱씹기다. 다 괜찮다고 합리화하며 책 한 장에 바다 한 번. 내 두 눈을 호강시킨다. 호강의 격에 점점 높아지는 중 내 마음에 남은 책의 한 글귀.
사람살이가 자본의 논리에서 조금만 길을 틀어도,
우리의 얼굴엔 생존을 위한 고단한 긴장 대신,
느긋한 휴식의 미소가 어른거린다는 사실도.
- 목수정의 '당신에게, 파리' 중
지금의 딱 내 모습이었다. 쓰지 않고 지나칠 수 있었던 육아휴직을 선택하며 자본의 논리에서 조금 길을 틀었다. 늘 바쁘다는 말을 달고 살았던 긴장 대신 무려 제주에서 느긋한 휴식을 취한다. 수요일 아침 방송 담당자라 화요일은 늘 긴장모드였는데 한가로이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다.
긴장 없는 삶이 지루할 수도 있고, 자본의 논리에서 멀어지는 것이 삶을 더 각박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은 좋기만 하다. 카카오톡 이모티콘 하나에 깔깔거리고 웃는 아이의 미소가 내 차지가 되고. 장사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머무를 수 있을 만큼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있음에 늘 날카로웠던 신경은 무뎌진다.
모래놀이를 하러 가기 위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갑자기 아이는 모래놀이를 하러 가지 않겠단다. 발에 모래가 묻는 것도 싫고 자기는 지난번에 사지 못한 스티커북을 사러 마트에 가겠단다. 처음에는 모래놀이의 좋은 점을 설명하며 아이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아이는 완강했다. 스티커북이 너무너무 사고 싶단다. 집에 들러 이모들에게 직접 가지 않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빨래를 한 뒤 마트에 가기로 했다.
처음에는 엄마가 이야기해주면 안 되겠느냐며 몇 번을 부탁했다. 약속은 지켜야 하는 것인데 지금 하이디의 마음이 변해서 약속을 못 지키게 되었으니 하이디가 이야기하는 것이 맞다며 나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사달라는 스티커북을 사주는 대신 그 과정에서의 책임은 아이가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냥 허용적인 부모는 될 수 없다.
스티커북의 열망이 부끄러움을 이겼다. 집에 가자마자 옆 집 이모에게 가서 모래놀이를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제법 긴장한 듯 큰 소리로 뻣뻣하게. 스티커북을 사고 난 뒤 협재해변 대신 우리는 한담해안산책로를 걷기로 한다. 엄마가 하이디의 부탁을 들어주었으니, 하이디도 엄마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마트까지 도보 10분. 사러가는 길이니 하이디는 신나게 걸었다. 마트에서 애월한담공원까지는 도보 20분. 혹시나 하고 택시를 불러봤으나 너무 가까운 거리라 잡히지도 않고 버스도 애매해서 그냥 걷기로 했다.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느려지는 아이의 발 길. 게다가 스티커북을 사고 나서 점심을 먹겠다는 아이의 고집 때문이 이미 점심은 때를 훌쩍 넘겼다.
스티커북을 샀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으냐며 좋은 기분으로 씩씩하게 걷자고 아이를 달래고 달래 한담공원에 도착했다. 늦은 점심을 먹으며 다리를 쉬고 에너지를 보충할 차례. 엄마의 욕심에 너무 무리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했으나, 이제는 아이가 산책을 하겠단다. 사실 나 역시 다리가 아파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절반은 있었던 터였다. 산책을 내일 해도 되는 거니까.
아이의 선택에 따라 한담공원에서 곽지해수욕장을 거쳐 집까지 걷는다. 한 시간의 시간. 마트에서 공원까지는 계속 처지는 아이 때문에 손을 잡아 끌 일도 많았었는데 이제는 손도 잡지 않고 내 보폭을 따박따박 따라 걷는다. 아까는 지쳐 말도 없어니 이제는 슈퍼윙스 놀이하자, 보니하니 놀이하자, 이 바위는 이 모양 같다, 바다가 예쁘다, 저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다... 수다가 끝이 없다.
하루 종일 버스를 탄 시간은 단 10분. 걷고 또 걸었다. 버스를 타는 것과 걷는 것은 또 다르다. 속삭이지 않고 이야기하고, 숨 죽이지 않고 까르르 웃고, 내키면 노래도 부르고, 거기에 걷는 속도만큼 느릿하게 풍경을 담을 수도 있다. 특히 바다를 바로 옆에 두고 걸을 수 있는 한담해안산책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 이효리의 말처럼 '사랑이 안 생길 수 없다'는 노을을 보기 위해 다시 이 길을 걷기로 한다.
<일곱살 하이디의 일기>
그림설명: 엄마랑 한담해안산책로를 산책 중인 하이디. 계단, 바위, 파도를 그림
일기설명: 오늘은 산책에 갔다. 좋았다. 바다 보는 게 좋았다. 돌하르방 흉내내고 엄마랑 (사진을) 찍었다. 엄마가 좋았는데 하지만 눈물이 날 것 같다. 하지만 사실은 엄마가 좋다. 엄마 사랑해. 눈물 나지 않게 해줘.
왜 눈물이 날 것 같았으냐 물었다.
쉽게 말을 하지 못하길래 귓속말로 해달라고 했다.
배를 타지 못해서란다.
투명카약을 타고 싶어 했는데
아빠 오면 함께 타자고 했던 것이 마음에 남았나 보다.
하이디가 아직은 힘이 없어서
노를 엄마 혼자 저을 수 없다는 말에 알겠다고 대답했었다.
이해했나 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많이 속상했던 거다.
어쩌면 자신이 힘이 없다는 사실도 속상한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 짧은 엄마, 나도 눈물이 날 것 같다... 주말에 아빠가 오면 꼭 타러 가야겠다.
<뚜벅이 이동 경로>
곽지모물에서 애월하나로마트로 가는 길만 202-1번 버스 이용.
다른 모든 이동은 두 다리로.
(집 > 카페, 지금 이 순간 > 집 // 애월중학교 > 애월하나로마트 > 애월한담공원 > 곽지해수욕장 >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