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제주도에 와 처음으로 알람을 맞춰놓고 잤다. 오늘의 목적지, 노리매로 가기 위해선 지선버스를 한 번 타야 하는데 한림에서 8시35분에 타지 않으면 다음 버스는 11시에 있기 때문이었다. 8시30분까지 한림으로 가려면 7시50분에는 집을 나서야겠더라. 6시50분이면 일어나는 하이디. 서두르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6시에 일어나 부스럭부스럭 움직이는 엄마의 소리 때문인지 하이디는 평소보다 더 빠른 6시30분에 눈을 떴다. 목표 달성 임박! 재촉하지 않겠노라 먹었던 마음은 저 어디로 던져버리고 이제 막 잠을 깬 아이에게 빨리 아침을 먹으라며 다그친다. 서울에서는 일상이었다고 합리화하면서.
아이는 알고 있다. 제주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다르다는 것을. 서둘러서 조금 빨리 나가자는 내 말에 하이디는 천천히 나가겠단다. 매일 아침 한 시간 정도는 보고 있는 EBS 때문일까. 제주에서 TV를 고장 났다 말하지 못한 나를 탓하며 7시가 되자 TV를 켰다. 아이가 평소 즐겨보지 않던 프로그램. 아이는 보지 않겠다며 끄라고 한다. 다른 이유 다 없이 그냥 천천히 나가고 싶은 거였다.
아이의 시간을 기다려주기로 했다. 선크림까지만 바르고 나가려 했던 나는 화장대 앞에 앉아 BB크림도 바르고, 눈썹도 그린다. 아이는 나와 상관없이 뒹굴뒹굴 책을 읽는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아이는 매번 집을 나서던 비슷한 시간이 되자 이제는 나가자고 한다. 한 시간의 차이. 그 한 시간으로 우리는 길에서 얼마나 더 시간을 보내야 할까.
처음 내 계획대로 버스를 탔더라면 노리매까지는 1시간 17분. 아이가 피곤하지 않도록 가급적 편도 시간을 1시간 30분 이내로 하겠다는 내 계획과 맞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간선버스만을 타고 가면 1시간 48분이 걸린단다. 그래도 간선버스는 배차간격이 짧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이제 남녕마트에 하차를 하면 된다. 어랏, 이쯤 되면 남녕마트 안내가 있어야 하는데 안내가 없다. 무슨 일이지. 허겁지겁 핸드폰에서 버스 노선을 검색한다. 이미 지났다. 카카오맵의 정류장과 실제 안내된 정류장 이름이 달랐던 거다. 다음 정류장 이름을 확인하고 다시 카카오맵을 검색. 빠른 길을 찾는다.
택시? 2주 차의 시작. 오늘은 가능하면 버스만으로 다녀보겠노라 결심한터였다. 하이디의 컨디션도 나쁘지 않았고. 제주국제공항 정류장에 내려 택시로 10분 남짓의 한라병원까지 이동. 거기서 원래 타야 했던 다음 간선버스를 기다렸다. 거의 1주일 만에 도심으로 들어오니 정신이 없다. 높은 건물들에 시선이 가리자 답답하고, 차가 도로를 꽉 채우고 있으니 신경이 곤두선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게다가 버스 개편까지. 버스를 기다리는 할머니들께서는 자꾸만 오는 버스마다 행선지를 물어보신다. 내가 타야 하는 버스는 30분 정도를 기다려야 하고, 그 사이 할머니들을 도와드리기로 했다. 3대 연속으로 행선지를 물어보는 할머니께 어디 가시느냐 여쭸다. 서광서리를 가신단다. 검색을 해서 버스 번호를 찾아드리고, 메모를 해드렸다. 다행히 내가 타야 하는 버스보다 할머니의 버스가 먼저 도착했다. 혹시나 틀릴지 몰라 기사님께 행선지를 확인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버스에 오르며 아기 엄마, 고맙다고 하신다. 그 모습을 본 하이디는 엄마 참 친절하다고 하고.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쳐 한 번 헤매어야 했고, 다시 도착한 정류장에서도 30분 남짓 버스를 기다려야 했지만 하이디는 짜증을 내지 않았다. 숫자 노래를 부르고, 몸으로 숫자 만들기를 하고, 가져간 책을 읽으며 그 시간을 즐겁게 보냈다. 엄마의 친절함도 조금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할머니를 도와드린 나도 할머니의 고맙단 인사에 기다림의 시간이 즐거워졌으니 말이다.
8시50분에 집을 나서 노리매에 도착한 시간은 11시20분.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시간. 긴 시간 고생해서 왔으니 더 즐겁게 구경해야겠노라 마음이 앞선다. 작년 5월 제주를 찾았을 때 들렀던 카멜리아힐. 하이디는 그곳에서 산책을 하고, 사진을 찍는 것도 좋아했다. 그 기억으로 비슷한 느낌이라기에 선택한 노리매. 제주도의 베스트 컷을 찍겠다는 다짐도 함께였다.
하지만 이 곳에는 큰 난관이 있었다. 본격적인 관람로로 들어오자마자 엄마들에게는 공포인 기프트샵이 보였다. 하이디라고 그냥 지나칠 수 있겠나. 구경만 하겠다고 약속하고 들어왔다. 그 구경이 도무지 끝나지 않는다. 아이의 시간을 기다려주자 기다려주자 인내심을 가지고 또 가져보지만 이제는 한계. 나가자는 나의 말에 하이디는 머뭇거린다. 구경만 하겠다고 했으니 사달라는 말은 못 하고, 비싼 거냐 안 비싼 거냐 착한 일을 하면 살 수 있느냐를 묻는다.
일단 기분 좋게 이 곳을 돌아봐야 한다는 의지로 아이에게 딜을 한다. 사진을 예쁘게 한 번씩 찍을 때마다 착한 일 스티커 한 개씩을 주겠노라. 10개를 모두 모으면 장난감을 하나 사는 것으로. 일곱살은 엄마의 딜에 좋다고 바로 응하지 않는다. 10개는 너무 많다며 8개로 하잖다. 꼭 웃는 사진이어야 하냐며 조건을 협상한다. 인상은 쓰지 않기로 하고 어렵게 어렵게 기프트샵을 빠져나왔다.
아이고. 몸은 나왔지만 마음은 기프트샵에 두고 온 하이디. 조금만 특별한 장소를 보면 사진을 찍겠단다. 억지웃음에 어색한 포즈를 지으면서. 그래도 사진을 찍어주니 어디냐. 제주도의 베스트 컷을 남기겠다는 다짐은 이미 시들해졌다. 썩 마음에 드는 컷 없이 8번의 사진을 모두 찍고 마지막 약속인 점심 먹기가 남았다.
노리매 본관에 위치한 카페로 갔다. 이 곳 역시 아이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장난감들이 놓여있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하이디에게는 보이지 않는 계산대 옆. 이번에는 내가 먼저 하이디를 불렀다. 꽃만 보여도 사진을 찍겠다며 포즈를 잡는 아이가 안쓰럽기도 했고, 긴 시간 버스를 타고 오면서 한 번도 짜증 내지 않은 아이에게 작은 것 하나 사주지 않겠다고 버틴 것이 조금 미안해졌기 때문이다. 아이의 선택은 작은 스티커북 하나. 다른 큰 장난감을 다 마다한 선택이었다.
스티커북 하나에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는 아이.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란다. 이때부터 여행은 순조로웠다. 스티커북과 함께 자연스러운 미소를 되찾은 아이는 사진도 기꺼이 산책도 즐겁게 함께 한다. 아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참 쉬운데 늘 어른의 기준이 먼저다. 고가의 장난감이 안 되는 것은 맞지만 작은 스티커북 하나쯤은 처음부터 사줬어도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사진을 찍는 딜 역시 어른의 기준이니까.
돌아오는 길은 수월했다. 노리매 입구의 버스정류장에 앉마자마 버스가 온다. 일단 다가온 버스에 무작정 올랐다. 자리를 잡고 앉아 바로 카카오맵 검색. 화순환승정류장에서 갈아타야 하는 급행버스 역시 10분도 안 걸려 도착. 버스를 타는 시간이 조금 길기는 했지만 정류장에서 보내는 시간 없이, 게다가 급행을 탄 덕에 편히 올 수 있었다. 하이디는 급행버스에서 잠깐 잠이 들었고. 일곱살이면 여행이 편해진다는 것을 잠을 깨울 때 실감한다. 내릴 곳을 조금 앞두고 아이를 깨우자 아이는 수월하게 일어난다. 걱정했던 잠투정, 다시 잠들기는 없었다.
집 앞 정류장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길, 비가 내린다. 함께 우산을 쓰고 아이의 바람에 따라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온다. 무사히 하루 여행을 마쳤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우리의 노랫소리는 유난히 즐거웠다. 제대로 뚜벅이답게 뚜벅거리며 다닌 하루. 정말 긴 시간 버스를 탔음에도 생각보다 피곤하지 않은 이유는 나의 에너지원, 하이디 때문이리라. 든든한 동반자 하이디, 오늘 고생했어. 그리고 고마워!
<일곱살 하이디의 일기>
그림설명: 노리매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하는 모습, 표를 들고 있는 사람이 엄마.
일기설명: 오늘은 노리매에 갔다. 너무 너무 신났다. 동화관도 가고 인어공주 스티커북도 가서 인어공주 수첩 만들었다. 너무 재미가 있었다. 다음에 또 와야겠다. 아이~ 재밌어라~ 너무너무 좋다~ 엄마 아빠 사랑해. 노리매에 아빠도 왔으면 좋겠다.
<뚜벅이 이동 경로>
1) 곽지모물 > 202-1(배차간격 15~20분) > 제주국제공항 > 택시 > 한라병원 > 250-4 > 노리매
* 카카오맵에 나오는 '남녕마트' 정류장은 실제 없음. 다른 이름으로 안내되는 듯
* 250번은 -1~-4까지가 있는데 배차 간격이 상이하니 확인할 것
노리매까지 가는 205-4번은 제주터미널 기준 7시15분, 10시30분, 17시45분에 있음
2) 노리매 > 751-2(배차간격 1시간 이상) > 화순환승정류장 > 급행 102(20~40분) > 한림리 >
202-1(15~20분) > 곽지모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