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휘이 휘이.
바람보다 더 거친 휘파람 소리로 가득 찬 바다.
오래도록 참은 숨을 한 번에 몰아 뱉으며
해녀들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린다.
테왁 하나만을 들고
맨몸으로 거친 파도에 뛰어들어
해산물을 채취하는 그녀들.
“누구나 깊은 데서 물질할 때는
숨이 깔딱 넘어가는 고비를 두 번쯤은 거쳐.
저승에서 벌어서 이승에서 쓰는 거지” - 어느 해녀
휴직 전 내가 회사에서 담당하던 업무는 사내 커뮤니케이션이었다. 그중 사내기획방송이 큰 비중을 차지했고. 사내방송이다 보니 작가, PD의 구분이 따로 있지 않다. PD가 기획부터 구성, 촬영 현장 지휘, 원고, 편집까지 1인 다역을 소화하는 구조다. 그래서 앞의 저 글 귀는 내가 쓴 한 방송 원고의 일부다.
제주 해녀를 직접 취재한 방송은 아니었다. '타이밍'이라는 주제로 타이밍의 중요성을 소개하는 방송의 프롤로그 일부다. 글로 만나고, 영상으로 만났지만 실제로는 보지 못한 제주 해녀들. 강인함은 해녀들만의 몫이 아니라고 했다. 제주도민이 직접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귤밭도 당근밭도... 제주의 많은 밭농사가 할머니들이 계시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다고 한다. 다리가 아프면 엉덩이를 끌면서 일을 하시는데 그 움직임을 젊은 사람들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단다.
모녀가 잠든 사이, 홀로 아침을 깨운 남편은 제주까지 고이고이 싣고 온 자전거를 타고 용두암에서 애월까지 달렸다. 10시가 조금 넘어 도착할 것이라는 카톡만이 핸드폰에 남아 있었다. 서귀포자연휴양림을 가볼까 고민하며 외출 준비를 마쳤는데 바람같이 들어온 남편이 서두르기 시작한다. 12시에 출발하는 비양도 배를 타야겠단다.
서둘렀기 때문인지 배를 타기까지는 40분이 남았고, 간식을 달라는 하이디의 청을 들어주기 위해 들린 매표소 2층 작은 카페. 그곳에서 전설 같은 제주 할머니를 만났다. 카페의 주인장이셨다. 다른 직원은 어디 없나 두리번거렸지만 작은 체구의 꼿꼿한 할머니 한 분만이 계셨다. 커피를 파는 카페에 말이다. 커피를 내어주시는 할머니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 실례인 줄 아는데요.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여든넷!".
비양도로 간다는 우리에게 섬을 구경하는 법을 귀띔해주신 할머니는 재봉틀 앞에 앉으신다. 다시 한번 놀랄 차례. 가게 곳곳에 걸린 수제품들이 할머니 솜씨란다. 요즘 유행하는 스트라이프부터 고운 꽃무늬까지 벽면 가득 걸린 세련되면서도 예쁜 에코백을 보며 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여든이 넘은 할머니는 카페를 운영할 수 없다는 편견, 제주도 시골 할머니는 촌스러울 것이라는 편견을 모두 물리치는 제주 할머니셨다.
비양도 초입, 귀함이 더해져 더욱 예쁜 작은 비양분교장이 아이의 발길을 잡았다. 더 놀겠다는 아이를 달래 점심을 먹자며 식당으로 향했다. 카페 주인 할머니의 추천이었다. 섬의 해녀분들께 직접 구할 수 있으니 그럴까. 어제 아침에 먹은 15,000원의 보말죽이 이 곳에서는 10,000원. 다른 음식들도 제주도보다는 저렴했다. 그리고 갈치구이가 서비스라는 놀라운 사실! 할머니와의 인연이 전해준 넉넉한 섬의 인심에 여행이 더욱 즐거워진다.
식당을 먼저 찾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섬을 도는 방향과 반대로 섬을 돌게 됐다. 그러다 보니 오다가다 만나는 사람들이 드물어 섬 전체가 거센 바람과 우리 차지인 듯했다. 우리가 걷는 속도대로 흐르는 시간. 아이는 다시 비양분교장의 놀이터에 가겠다며 놀이터 찾기 탐험을 나선다. 섬을 한 바퀴 돌아야 다시 놀이터가 나온다는 사실은 어른들의 비밀이다.
우리가 점심으로 먹었던 맛있는 보말과 소라는 해녀들의 물질 덕분일 게다. 10m가 넘는 물속에서 숨을 참고 강한 수압을 견디며 1분 이상을 해야 하는 작업. 그 물질의 현장을 비양도에서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섬 반 바퀴를 돌았을 즈음 정자에 앉아 좋다, 예쁘다를 되뇌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바다 한가운데 주황색 테왁이 눈에 들어왔다. 영상을 만들며 내가 봤던 그 테왁이 맞을까. 저 테왁은 왜 저기 떠 있을까. 그리고 등장한 검은 실루엣. 제주 해녀다.
한참을 바라봤다. 거센 바람의 거센 물살. 생사의 타이밍을 매 순간 넘나드는 고귀한 광경이었다. 거센 바람 속을 유유자적 걷는 한 가족. 거센 파도 속을 거칠게 넘나드는 해녀. 삶의 경중을 따질 수는 없지만 순간의 최선에는 무게가 있지 않을까. 해녀의 물질을 바라보며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순간에 더 최선을 다해 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은 거셌지만 바람 속을 걷는 우리의 시간은 느렸기에 잊고 있던 방송 원고의 한 페이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고요한 섬 둘레길에서 생각은 깊어졌다. 제주를 바다 건너 조금 떨어져 바라보는 시선도 생각을 변주했다. 게다가 놀이터 찾기 탐험에 열중하며 평일에 보지 못했던 아빠 옆에 껌딱지처럼 딱 달라붙어 딸도 엄마의 사색을 도왔다.
드디어 한 바퀴를 돌았다. 원래 목표는 12시에 들어와 2시 배를 타고 나가는 것. 시간이 우리의 속도대로 흘렀기에 이미 2시는 지났다. 그러면 어떠랴. 놀이터 찾기 임무를 완수한 아이에게 마음껏 놀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면 될 것을. 파릇파릇 잔디 운동장에 담 넘어 제주가 보이는 학교. 단순한 놀이터지만 아이에게는 신나는 천국이 되어준다. 그리고 아이의 환한 모습을 바라보는 엄마도 천국을 느끼고.
제주 할머니들은 거센 바람 속에서 엄마여야 했기에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나는 내 시대에 맞는 강한 엄마가 되기 위해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들어주고, 더 많이 아이처럼 놀아주며 더 느긋하고 더 행복해지리라 다짐해본다. 오늘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아빠. 단 둘이 남은 제주에서 강한 제주 엄마로 아빠 몫까지 보태어 아이와의 시간을 최선을 다해 누릴 것이다.
<일곱살 하이디의 일기>
그림설명: 놀이터에서 통 미끄럼틀을 타는 옆 방 동생과 하이디
일기설명: 오늘 놀이터 가서 놀고 그랬다. **이랑 놀았다. 자동차 보내고 통 미끄럼틀 탔다. 근데 너무 많이 놀아서 지쳤다. 다음에 또 와야겠다. 그리고 아빠가 보고 싶다. 아빠 보고 싶어. 사랑해, 엄마 아빠. 오늘 패드를 엄마랑 만들 거다.
저녁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옆 방 동생을 만났다.
바람이 거세 고작 15분 정도 옆 방 동생과 곽지해수욕장 놀이터에서 놀았을 뿐인데
12시에 들어가 3시가 넘어서 나온 비양도를 이긴 거다.
비양도에서도 비양분교장 놀이터에서 아빠랑 신나게 놀았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일기 속의 패드는 종이로 갤럭시 패드와 같은 그런 패드를 만드는 것인데
매번 패드에도 주제가 있다.
오늘은 '아빠가 좋아하는 요리 패드'였다.
<뚜벅이 이동 경로>
오늘은 주말아빠덕분에 뚜벅이가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