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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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05학번이다. 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99학번을 보는 일은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새로 생긴 동아리에 가입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99학번들이 여럿 와 있었다. 선배이긴 했지만 우리는 모두 동아리 같은 기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엔 더 개념 없었던 나는 99학번 선배들과도 막말을 주고받으며 친해졌다. 그래도 그중 꼰대가 있어서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신입생 때는 책을 많이 읽어야 돼. 나중에는 책 읽을 시간이 정말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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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말을 귀담아듣고 도서관에 갔다. 그리고 열 권짜리 소설의 첫 권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소설을 읽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몇몇 작품에 크게 감명받고 그 작가의 신간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다. 서고에 없는 책을 읽고 싶다고 신청하면 도서관에서 책을 사주고, 구매 신청자에게 가장 먼저 대여를 해준다. 나는 하루키의 소설과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들을 그렇게 읽었다. 회사에 다니자 소설을 읽을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돈은 학생 때보다 많아졌다. 그때부터는 소설을 사서 읽고 작가 별로 고이 책장에 모셔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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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어떤 사람에게 이 소설을 추천하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주변 동료들에게 소설책을 추천하거나 사서 선물하곤 했다. 회사에서 한 친구에게 소설을 추천해주었는데, 같은 팀에서 일하는 분이 자신에게도 소설을 추천해달라고 카톡이 왔다.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적절한 소설을 추천하기 위해서 요즘 관심사가 무엇인지 물었다. 요즘 관심사는 남녀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남녀 관계가 등장하는 소설 중에 추천할 만한 것이 있나 머릿속을 스캔했다. 곧바로 김연수의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이 떠올랐다. 아 이걸 빌려드리면 딱이겠네, 신나서 바로 빌려드리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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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좋은 소설을 추천받아서 고맙다면서 보답으로 음악을 추천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당연히 추천 음악이 유튜브 링크로 올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시디와 맥에 연결할 수 있는 시디롬을 가지고 나왔다. 가수 이름은 kings of convenience 라고 했다. 편리함의 왕이다 뭐 그런 뜻이죠 하하. 하나도 웃기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웃었다. 그 시디를 받아 들고 집에 가서야, 아 이게 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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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편이 된 썸남과 요즘도 종종 그 노래를 듣는다. 카카오 미니에게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 노래 틀어줘, 했더니 cayman island를 틀어준다. 참 아름다운 노래인데, 비자금 이슈 때문에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케이만군도가 조세피난처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케이만군도에 회사가 2백만 개란다. 페이퍼 컴퍼니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내 노래 감상 다 망쳤다. 그래서 다스는 누구껀가요, 내 감흥을 돌려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