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73
1
오래간만에 논을 봤다. 수확이 끝나있다. 농부의 일년은 이미 끝났구나 싶다. 들판에 뿌린 땀은 농작물로 돌아온다. 한때 나는 나의 일이 농부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씨앗을 뿌리고 그것이 자랄 수 있기 도움을 주면서 기다리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 농부처럼 꾸준한 노력이 필요했지만 그렇게 인내심이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아마 결실이 나오기도 전에 판을 엎은 농부일 것이다.
2
저 하얀 비닐 덩어리는 어디에 쓰는 것일까. 항상 궁금하다. 비닐안에는 짚이 들어있는 걸까. 마시멜로 같은 자태를 뽐내며 빈 밭에 앉아 있다. 삼십년 평생을 쌀을 주식으로 먹었지만 논농사의 생리를 전혀 모른다. 농부의 땀이라는 명사만 머리에 남았다. 논에 내려가서 속에 뭐가 들었나 한 번 보면 끝날 궁금증이건만. 그렇게 해본 적은 역시 삼십 평생 한 번도 없다. 죽기 전까지 모를 것만 같다.
3
가을 볕은 유난히 붉은 것 같다. 여름의 볕은 환한 노랑이고 가을 볕은 원적외선 같은 주황 느낌이다. 아 그저 해가 짧아져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넘어가는 해는 주황빛을 토한다. 날씨가 추우니까 느낌이라도 따듯하라고 주황인가. 저멀리 태양이 인간의 그런 사정까지 고려할리는 없을텐데. 무심한 우주의 불덩이로부터 위안을 얻는다.
4
이번에 관찰된 중력파는 13억광년 떨어진 곳에서 왔다고 한다. 두 개의 블랙홀이 하나로 합쳐 지면서 시공간이 왜곡된 것이다. 그 중력파가 지구에 도달했을 때 지구의 시공간도 왜곡되었다. 똑같은 공간의 거리가 변동했는데 그 변동은 레이저로만 측정할 수 있는 차이라고 한다. 얼마나 큰 에너지였으면 13억광년이나 떨어진 곳에서 지구까지 왔을까. 그 파장을 소리로 변환하면 두 블랙홀이 하나로 합쳐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동영상으로 들어봤는데 물방울이 똑,하고 수면에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였다. 와장창창 할 줄 알았는데, 우주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공간인 것 같다. 많은 예상을 무력화시키고, 상상 그 이상을 보여주고, 또 그 이상의 미스테리를 주는 유한의 공간. 정말 멋지다,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서 오래 살고 싶기도 하다.
5
앞 자리에 앉은 동료들은 출발부터 지금까지 회사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나도 한 패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들판과 햇볕과 13억광년 떨어진 중력파를 생각하다가 회사 이야기로 돌아오니 시시하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세계의 무늬가 어떤지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그 세계의 종류도 우주의 별만큼 많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해도해도 끝이 없나보다. 오늘 밤은 회사 사람들과 보낼 예정이다. 오늘은 현미경은 거둬두고 들판을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