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이야기

day-77

by Lu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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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때 숙제로 유서를 써본 적이 있다. 두 번이나 썼는데 두 번 다 늦은 밤 집에서 쓰다가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유서를 과제로 내준 교수는 유서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내용을 강조했다. 장례 희망사항과 유산 처리 방법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적어야 한다고 했다. 집에 와서 어떻게 장례가 치러지면 좋을지 고민했다. 일단 시신은 기증하는 것이 좋을까? 죽으면 썩을 몸 이왕이면 기증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나라는 유기물이 찢어져서 여기저기로 간다니 느낌이 썩 좋지는 않았다. 어렵구만. 그리고 나한테 재산이 뭐가 있는지 헤아려 봤다. 내 통장이 어느 어느 은행에 있더라? 남은 내 소지품들은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까? 재산은 아니지만 나의 소셜 계정 비밀번호라도 남겨 놓아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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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저런 것들을 요건에 맞게 적은 뒤 할 말을 고민했다. 죽은 사람의 입장이 되어할 말을 적는 것은 퍽 어려운 일이었다.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없는데 뭘 또 구구절절이 말하고 있기도 구차하고.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남기기엔 아쉽고. 가족들과 소중한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따듯하게 전하고 싶지만 작은 단어나 말 한마디가 자칫 영원한 슬픔을 남기진 않을까. 적기가 매우 어려워지는 대목이었다. 또 이미 죽었는데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소용일까 싶기도 했다. 더구나 죽어서 대단한 슬픔을 안긴 주제에 슬퍼하지 말란 말도 주제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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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이 말많기로 유명한 나지만, 의외로 유서는 간결해졌다. 숙제는 교수님에게 제출했다. 숙제를 제출하던 수업시간에 교수는 그런 말을 했다. 혹시 자살할 거면 나를 찾아오라고. 그럼 내가 밥 한 끼 사줄 테니까, 죽기 전에 따신 밥이라도 먹고 죽으라며. 무심한 듯 따듯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문득 궁금하다. 누군가 교수님을 찾아갔을까. 그랬다면 교수는 정말 밥 한 끼 사주고 돌려보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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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첫 직장에는 싸이월드라는 서비스가 있었다. 가입자가 삼천오백만에 달하는 서비스였다. 신입사원 연수 때 싸이월드 서버가 있는 곳에 갔었다. 사용자들의 정보를 저장하는 하드웨어가 있는 곳이다. 거기서 물어봤다. 사용자가 사망하면 그 데이터를 지우나요? 가입자가 계속 생기면 저장공간이 모자랄 텐데, 필요 없는 데이터를 지우지는 않나요? 사망한다고 하더라도 데이터를 지우지 않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저장매체가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어서 뭘 지우거나 그러지는 않아도 된단다. 신기한 이야기였다. 죽었다고 따로 표시해 주지 않으면 내 온라인 친구들은 내가 죽은 줄도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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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이 죽으면 사망 시점에 텔레비전에 그 사람의 모습을 더 자주 볼 수 있다. 이미 죽었다는 그 사람을 나는 실제로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그는 여전히 텔레비전 속에서 웃고 게임을 한다. 그럴 때마다 연예인이 죽으면 희한하게 더 가까이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사람이 살아있을 때 그 사람의 말투나 모션, 표정을 학습시켜 놓으면 그 사람이 죽은 뒤에도 우리는 AI를 통해 그와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학습된 망자의 알고리즘은 늙지도 않고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있을 수 있다. 얼마나 극적인 부활인가. 나는 죽었지만 타인에게 나의 존재가 영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존재의 불멸을 누구의 관점에서 구현할 것인가, 이것도 나중에 유서에 써야 할지도 모른다. 괜히 나 AI로 만들어서 살아있는 사람처럼 만들지 말고, 죽었다는 걸 기억해줘, 이런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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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동에 가면 환기미술관이라는 곳이 있다. 김환기라는 화가의 작품을 전시한 곳인데 이 미술관은 그의 아내가 만들었다. 여러 번 들러 보았는데 작품도 조금씩 바뀌고 부부의 깨알 같은 서신들도 전시하고 있다. 그곳에 가면 이것이 그의 아내가 남편의 기억하는 방식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이 깃들어 있다. 내가 죽는다면 나를 사랑한 사람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나는 죽었기 때문에 아무 감정도 생각도 없다. 행복했던 삶이 아쉽지도 않고, 꼬이고 얽힌 기억이 있어도 슬프지 않다. 그러니 그들의 방식대로 지어내고 생각하지 않고 이대로를 받아들여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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