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강에서 건져서 쓰는 회고자료

day-79

by Lu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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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의 일 년을 돌아보는 자료를 만들고 있다. 내가 만들어야 할 일은 아니었지만 나의 리더는 일이 많다. 그리고 우리 팀은 리더와 나 둘 뿐이다. 시간이 없어 보이시는데, 제가 만들게요. 선뜻 말은 뱉었는데 작업 속도가 더디다. 원래 오늘까지 완성하기로 했지만 다 못 만들고 퇴근해 버렸다. 내일 오전 중에는 끝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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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손을 바로 못 댄 건 알 수 없는 복잡함 때문이었다. 우리 팀에서 지금 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는 계획 대로라면 지난 여름에 끝났어야 했다. 그런데 아직도 마무리를 못하고 이어지고 있다. 덕분에 지금 상황은 무척 명료해지긴 했다. 우리는 어떻게든 이 프로젝트를 끝내야만 한다. 어떻게든 끝낸다. 이 말을 하루에 한 번씩은 하고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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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일 년 동안 있었던 일을 정리하자니, 엉킨 실을 풀어야 하는 기분이었다. 일을 좀 더 쉽게 하기 위해서 카테고리를 나눴다. 인물편, 정체성편, 업무편이다. 인물편에 대한 이야기는 술술 나왔다. 연초에 여섯 명으로 시작한 팀이었는데 이제는 두 명이 남았고, 새로운 인물 두 명이 등장한다. 일 년 동안 일어난 이 현격한 변화를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리더는 나에게 물었다. 우리는 내년에도 이럴까요? 나는 대답했다. 당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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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편은 의외로 짧게 끝났다. 뭔가 팀의 정체성 때문에 방황을 많이 한 것 같았는데, 돌이켜 보니 재작년이 훨씬 심했었다. 올해는 팀 정체성 때문에 열렸던 회의는 한 번뿐이었다. 물론 그 회의 후속작업이 영영 되지 않았다는 것이 대함정. 복병은 업무편이었다. 우리 팀의 주요 업무 중에 내가 리더인 프로젝트는 한 개였다. 그런데 그 과제가 다른 거랑 합쳐졌다가, 다시 내용이 완전히 바뀌고, 약간 진행이 되다가, 지금은 현상유지만 하고 발전을 못 시키고 있다. 그래서 정리를 하려고 작성한 자료들을 봤는데 도대체 왜 중간에 내용이 바뀐 건지 자세한 이유가 써있지 않았다. 왜일까. 왜 가이드를 만들다가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전환한 거지? 기억을 되짚어봐도 구체적으로 생각나는 것이 없다. 이제야 뭔가 많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담당자인데, 히스토리 조차 기억하지 못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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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중간에 회사에서 자기 회고 같은 것을 하고 피드백을 받으라고 했을 때도 할도리 다 했다고 생각했던 나였다. 물론 잘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하기 싫은 와중에 할 만큼 했다 이런 생각이었는데. 역시 남이 깔아주는 판에서 말고 스스로 뭔가를 되짚어 나갈 때 방어기제의 고치를 열고 나올 수 있는 것 같다. 형편없다. 이런 상태로 회사를 몇 년 더 다니겠다고 생각한 건 이기심이 아니었을까. 다닐 거면 더 열심히 다니던가 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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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회고 자료를 완성해야지. 회고 문서의 제목은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라는 제목이다. 불과 1년 전인데도 여섯 명이 함께 했던 우리 팀이 아주 오래 전의 팀처럼 느껴진다. 했던 프로젝트들도 정말 오래된 것 같다. 2017년 초에 완성한 우리 팀의 업무계획은 지금과 많이 달라졌다. 중간에 변동사항도 많아서 만든 일정표가 몇 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다. 내 기억 속에서 저 멀리 망각의 강을 건너버린 일들을 붙잡고 만들어 본 자료라 그렇게 이름 붙였다. 아주 먼 옛날 같은 2017년 한 해를 되돌리며 회고 잘해야지. 그리고 그날 2018년 업무 계획도 짜야하는데 잘 되려나. 올해 같은 일 년을 안 보내려면 내년에 뭐할지 열심히 궁리해야 하는데. 그러기엔 벌써 목전에 닥쳤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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