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80
1
크리스마스는 일년 중 가장 기다려지는 명절이었다. 세배하고 용돈 받는 날보다 더 좋았다. 왜냐면 이 날에는 내가 좋아하는 선물이 도착하기 때문이었다. 산타 할아버지는 내가 좋아하는 물건을 알고 있을까, 정말 올해도 나에게 선물을 줄까, 두근거리는 마음이 식기 전에 산타의 선물은 내 앞에 도착했다. 눈 뜨자마자 포장지를 뜯어제끼는 그 설렘. 잠들 때 아침이 그렇게 기다려지는 때가 앞으로의 인생에 몇 번이나 더 있을까.
2
어릴 때 오빠와 나는 같은 방을 썼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항상 양말을 챙겼다. 산타 할아버지는 양말에 선물을 넣어준다고 해서 문 앞에 양말을 걸어두었는데 정말 선물을 거기에 넣어주었다. 선물에는 늘 친절한 메시지 카드도 함께였다. 우리는 산타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양말을 머리맡에 둔 뒤에 잠들지 않기로 굳게 다짐했다. 잠들면 서로 깨워주기로 약속까지 했다. 그렇게 늦게 까지 산타를 기다리면서 키득대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3
다음날 일어났는데 선물이 없었다. 아, 우리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왜 안온 거지 울상이 되어 방을 나왔다. 엄마에게 우리가 밤새 산타를 기다리는 바람에 산타가 들어오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엄마는 산타 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이브에 너무 바쁘다고 했다. 너무 바빠서 문 앞에 선물을 두고 갔을지도 모르지,라고 엄마는 말했다. 우리는 내복 바람으로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문 앞에는 포장된 선물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선물을 갖고 와, 엄마, 진짜 엄마 말대로 선물이 문 앞에 있었어! 하면서 소리치며 들어왔다.
4
지금 생각해보면 몰랐던 게 더 이상하다. 산타의 선물에는 늘 엄마 글씨로 써진 카드가 들어있었다. 동글동글하고 큼지막한 이응과 미음. 누가 봐도 엄마 글씨체였는데. 게다가 산타는 내가 오빠랑 얼마나 싸웠는지를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올해는 오빠하고 많이 싸워서 안 올까 고민했는데, 내년에는 착한 아이가 되라고 특별히 선물을 주는 거라고 산타는 카드에 썼다. 그 카드가 지금 어딘가에서 다시 나온다면 정말 엄마랑 배를 잡고 웃으면서 볼 텐데. 기억 속에만 있다.
5
어느 크리스마스에는 오빠와 나란히 인형을 받았다. 오빠는 어린 아기 때부터 리본 달린 고양이 인형을 좋아했다. 바로 헬로 키티다.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도 한결같은 취향이 있었는데, 크리스마스 선물로 몸통만 한 핼로 키티 인형을 받은 오빠는 크게 기뻐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초록색 개골구리 인형이 주어졌다. 왕눈이 개구리 인형이었는데 개구리 인형은 전혀 예쁘지 않았다. 핼로 키티는 살아있는 고양이 같이 예뻤는데, 개골구리는 2D 캐릭터를 억지로 3D로 만든 모양새였다. 일단 눈이 쇠로 된 판에 천을 씌운 모양이어서 뒤로 돌리면 눈알 뒤편의 쇠 부분이 보였다. 꼭 안으면 딱딱한 눈알판이 내 양팔을 짓누르는 느낌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침부터 초록색 개구리 인형을 준 산타를 미워하면서 엄마에게 비죽비죽 나도 고양이 인형이 갖고 싶다고 칭얼댔다. 며칠 뒤 엄마 손을 잡고 동네 영아트에 가서 내 인형을 고양이 인형으로 교환했다. 그랬는데도 나는 이 선물을 산타가 준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6
산타가 내가 많이 운 것, 오빠와 많이 싸운 것을 늘 속속들이 알고 있어서 울거나 싸울 때면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러다가 올 해 크리스마스에는 선물을 못 받는 거 아닐까. 그래도 산타는 항상 봐준다는 식의 카드를 남기며 매년 나에게 꼬박꼬박 선물을 주었다. 엄마는 우리 몰래 선물도 사고 카드도 쓰느라 얼마나 진땀을 뺐을까 싶다. 게다가 산타를 만나겠다며 잠을 안 자고 버티는 애들에게 어떻게 선물을 몰래 줘야 할지 고민했겠지. 그러다 찾아낸 묘안이 문 앞에 두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의 엄마를 생각해보니 엄마도 참 귀엽다.
7
작년 크리스마스에는 결혼할 남자 친구를 우리 집에 불러서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남편은 평소 엄마가 보온병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눈여겨 보고서 예쁜 보온병을 선물했다. 그 보온병을 엄마는 예쁘다고 아껴두고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 쓰지 않고 있다. 오늘은 엄마가 반찬을 들고 집에 다녀갔다. 무거운 반찬을 들고 대중교통을 타고 왔길래 왜 차를 안 가져왔냐고 물었다. 곧 며칠 여행을 가는데 차를 좋은 자리에 대놔서 그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버스를 타고 왔다고 한다. 특별한 차도 아닌데 우리 남매가 선물한 거라 엄마는 항상 차를 아낀다. 마음에 안 드는 물건을 드릴 수는 없는데, 마음에 드는 물건을 드리면 또 아낀다고 안 쓰는 엄마. 올해는 무슨 크리스마스 선물을 해 드려야 알차게 잘 쓰시려나. 이제 내가 엄마의 산타가 되어 선물을 고민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