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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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소파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문득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쪼꼬렛을 먹어야겠다! 냉장고에 선물 받은 고디바 초콜릿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흰 초콜릿을 하나 집어 입안에 넣었다. 달았다. 초코맛이었다. 이걸 내가 눈감고 먹었다면 과연 이게 화이트 초콜릿인 줄 알기나 했을까. 절대 몰랐을 것이다. 나는 상급 둔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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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지진 때도 그랬다. 사무실 여기저기서 몇 초 차이로 핸드폰 알림이 울리기 시작했다. 내 뒷자리 동료는 핸드폰을 자리에 둔 채로 회의를 갔는지 주인 없는 자리에서 핸드폰이 빽빽 울렸다. 재난 문자 알림 소리는 꽤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소리다. 사무실의 모든 주의를 뺏어가는 그 핸드폰에게 다가가 아무 버튼이나 눌렀다. 소리가 멎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서 문자를 보니 경상도에서 지진이 났다는 알림이었다. 경상도 지진을 서울 사람한테도 알려주네. 그리고 다시 일을 하는데 앞자리 동료가 사무실이 흔들렸다고 했다. 에이 무슨 소리예요. 지진은 경상도에서 났는데 여기가 흔들릴 리가 없잖아요 하하. 그리고 자리에서 계속 일을 하는데 전화가 왔다. 남편이었다. 사무실이 흔들렸는데 얼른 밖으로 나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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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흔들림의 방식을 기억하고 있었다. 작게 떨리다가 크게 출렁출렁했다고 한다. 왜지, 왜 나는 같은 건물에 있었는데 아무것도 못 느꼈던 거지??? 왜긴 왜겠나... 상급 둔탱이이기 때문이지... 올해 초에 우리 팀 사람들이 다 같이 성격 big 5 검사를 했었다. 심리학의 이론적 근간이 두터운 성격 검사라고 한다. 학자들이 사람을 수식하는 형용사를 사전에서 모두 찾아서 분류를 했는데 다섯 가지로 분류가 되었다고 한다. 이중 다섯 가지 중 하나가 바로 '신경증'이다. 나는 신경증 성향에서 압도적으로 낮은 점수가 나왔다. 둔탱이임을 점수로 인증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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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로 심리학을 전공한 동료는 내 점수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이러니 루시한테 성과등급이니, 연봉 인상률이니하는 말을 하면서 동기부여를 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는 거지. 이런 점수 나오는 사람들한테는 잘 못하면 부정적인 상황이 생길 거야, 이런 말을 백 번 해도 동기부여가 안돼요. 그 말을 듣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 그렇구나 나 눈에 뵈는 게 없는 사람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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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에는 선배들에게 무개념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나마 무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귀여워해주는 선배들이 하는 말이었고, 정말로 선배의 큰 분노를 산 적도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여자 선배였는데 성격이 대단해서 아무도 그 앞에서 반론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담당 교직원도 그 선배 눈치를 볼 정도였다. 나도 무서워하는 선배였는데, 그래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서 죄송하지만 그건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선배는 내 이름 세 글자를 또박또박 부르면서 말했다. 너 많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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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만행들을 저지르면서 살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신경증 성향이 낮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나는 괜찮은데 주변 사람들이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 멀리 가지 않고 같이 100일 글쓰기를 하는 친구들 중에도 피해자가 있다. 엠티 간 내내 장난을 너무 심하게 쳐서 결국 말미에 랄라가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코칭 과목 숙제를 하겠다며 전혀 진로상담 같은 거 받고 싶지 않은 타이러스를 불러내 코칭을 한 적도 있다. 말이 코칭이지 그냥 슈퍼 꼰대질이었다. 세상 민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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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한 탓에 세상에 민폐만 만들어 내다가 결국 둔함때문에 죽거나, 그런 슬픈 일이 일어나서는 안될 텐데. 없는 감각들도 조금은 길러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내가 엄청나게 신경증 성향이 낮은 이상한 사람임을 자주 상기하도록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