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88
1
건넌방에는 회색 철제 바구니가 있다. 그 안에는 감자 한 뭉텅이와 고구마 한 뭉텅이가 있다. 고구마는 추석에 시아버지가 텃밭에서 캤다고 주신 거다. 두 박스나 주신 걸 친정집에 다 내려놓고 몇 개만 갖고 왔는데, 아직 한 개도 못 먹었다. 감자는... 언제 산 건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 몇 달은 된 것 같다. 감자는 된장국 끓일 때만 쓰는데 내가 잎채소를 더 좋아해서 감자는 정말 넣을 것이 없을 때만 넣었다. 그러다 보니 아직도 남아 있다.
2
언젠가 감자 샐러드를 만들면서 작은 찐 감자 한 개를 남긴 적이 있었다. 다 으깨서 샐러드를 만들까 하다가, 아침이나 언제 찐 감자 먹을 일이 있지 않을까 해서 하나를 으깨지 않고 둔 것이다. 결국 그 감자는 반찬통에 담겨서 냉장고에서 한 일주일을 살다가 버려졌다. 우리 부부가 소식이들인 탓에 음식들이 잘 줄어들지 않는다. 결혼하고서 야식을 먹은 횟수는 손에 꼽는다. 오히려 저녁 무렵 과자를 먹었다가 배가 불러 저녁밥을 못 먹는 일도 있었다.
3
고구마 먹을 일이 없다고 투덜대자 엄마는 깍둑썰기를 해서 밥에 넣으라고 했다. 오늘 그걸 해보려다가 너무 피곤해서 포기했다. 공방 가는 일은 무척 즐겁지만 세 시간 동안 서서 원단과 씨름하고 나면 피로가 몰려온다. 장 보러 가고 싶기도 했는데 결국 집에 와서 소파에 기대 있거나 누워있기만 했다. 간신히 일어나서 일기를 쓰면서 나에게 여유로운 시간이 좀 더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망해 본다.
4
열 시쯤 눈이 떠지면 일어난다. 과테말라 원두를 왱하고 갈아서 향기를 맡은 뒤 뜨거운 물을 붓는다. 커피가 내려지면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발라 같이 먹는다. 그리고 지하에 있는 헬스장에 간다. 사우나를 하고 나오면 추운 날씨도 상쾌하다. 미뤄두었던 반찬을 해본다. 백선생표 무소박이를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천일염, 고춧가루, 젓갈 모두 사다 놓기만 하고 아직도 못해봤다. 큰 유리그릇에 해놓은 반찬을 잘 담아 냉장고에 재 놓고, 미싱방에 들어간다. 수달이 그려진 원단으로 남편 잠옷 바지를 만들어 줬는데 마음에 든다. 같은 원단으로 홈웨어로 입을 상의를 만든다. 긴 옷을 좋아하니까 재단할 때 길이도 좀 늘리고, 평소 잘 입는 긴팔 옷을 가져와서 팔 길이를 맞춘다.
5
그러다 피곤하면 읽고 싶은 책을 읽는다. 지금도 읽다만 전자책 하나, 서로 다른 지인에게 빌린 책 두 권, 읽고 스터디하기로 해서 읽어야 할 책 한 권이 나를 기다린다. 겨울이면 책 읽기는 더 좋다. 귤을 까먹으면서 책을 읽으면 노란 귤물이 책장에 묻기도 할 테지. 나중에 그 책을 다시 열어볼 일이 있다면, 아 내가 겨울에 귤 먹으면서 책을 봤었구나 하고 추억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일상을 매일 같이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 해도 좋다.
6
언제나 마음은 무언가를 해야지, 하고 바란다. 그에 반해 나는 피곤하기도 하고, 반드시 해야하는 일들도 있기 때문에 바라는 만큼 움직일 수 없다. 모진 성격은 아니라서 그냥 아 못했네, 어쩔 수 없지 다음에 하자, 이런 식으로 넘어간다. 넘어가더라도 희망사항에 대한 부채는 쌓여서 남는다. 결국 그래서 창고방을 털어 정리한 뒤 재봉틀을 놓게 되기는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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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에 매일 8시간을 일하는 곳에서는 하고 싶은 것을 잘 못 찾고 있다. 당연히 문서를 열면 해야 할 일들과 그 일을 이렇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럼에도 주말이면 월요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틀을 보내는 생활이 안타깝다. 그래도 일 년만 더 다니면 긴 안식휴가를 갈 수 있다. 그때 잠깐 놀아보면 아 역시 사람은 회사를 다녀야 몸에 곰팡이가 안 피는 거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날까지는 좀 더 지금의 생활을 유지해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