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9년

day-90

by Lu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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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에는 종말론이 판을 쳤다. 나는 종말론을 그다지 믿지는 않았다. 현실적인 성격인 나에게 종말론보다 더 무서웠던 것은 컴퓨터 에러가 날 거라는 소문들이었다. 그 당시 초등학생이었기 때문에 컴퓨터가 어떻게 돌아가는 물건인지 자세히는 몰랐다. 다만 컴퓨터는 이진법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라서 0과 1만 인식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2000년이 되는 순간 '2'라는 숫자 때문에 각종 오류가 생겨서 병원의 전산이 마비되거나 은행의 시스템이 꼬일 수 있다, 이런 말들이 떠돌았다. 시스템 오류로 아픈 사람이 죽으면 어떡하지 너무 걱정이 됐었다. 하지만 2000년이 되는 자정의 순간에도 별일은 없었다.


2

그 시절을 군대에서 보냈다는 사람들도 웃기는 에피소드가 많았다. 교회 다니는 후임에게 자기 손을 붙잡고 자라고 했다는 선임이 있었다는 둥, 종말론에는 군인의 담력도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제는 그런 우스갯소리도 함께 나눌 수 없는 세대가 등장했다. 내후년이 되면 빠른 2000년생이 대학에 입학하고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된다. 아직도 팀에서 막내를 맡고 있어서 서른이 넘어서도 꼬꼬마짓을 하고 다니는 나는 이런 상황이 참 생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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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팀에서 스터디를 하기로 한 책이 있었다. 나는 e-book 리더기를 구매한 참이라서 전자책으로 사서 보겠다고 했다. 옆자리 동료가 자기는 전자책이 싫다고 했다. 밑줄 긋거나 메모하는 게 불편하지 않냐며. 하지만 밑줄 치고 메모하는 기능이 편리해서 전자책을 쓰는 사람도 있다. 전자책을 안 쓰는 사람들은 진짜 불편해서 안 쓰는 게 아니라 쓰기 싫어서 안 쓰는 거라고 보면 된다. 동료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중에 자기가 메모하고 밑줄 그은 부분을 아들이 커서 보게 되면 좋을 것 같아서...라고 말을 흐렸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의 다음 세대는 종이책보다 전자책을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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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2999년에는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뉴 밀레니엄을 맞을까 궁금해졌다. 1999년과 비교하면서 자료화면 같은 걸 보게 되지는 않을까. 아 그런데 생각해보니 1999년에도 999년과 현재를 비교하는 자료화면은 보지 못한 것 같다. 아마도 사람들은 과거보다는 3000이라는 미래의 숫자에 매료되어 있겠지. 그때도 종말론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있을 것 같다. 그쯤에도 노스트라다무스 같은 이름들이 잊히지 않고 다시 튀어나올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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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천년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던 동료가 떠올랐다. 그는 자기만의 호텔을 짓고 운영하는 꿈이 있는데, 그 호텔 뒤에 창고를 만들어서 물건을 저장하고 싶다고 했다. 현대의 물건들, 예를 들면 핸드폰이나 컴퓨터 같은 것들을 넣어놓고 천년 동안 잠가놓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천 년 뒤에 그 창고의 문을 열어서 천년 전 사람들이 어떤 물건을 썼는지 보고 만질 수 있도록 전시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런 쓸모없는 일을 왜 하는 거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2999년의 사람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도 가치 있는 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1999년의 나는 999년의 물건들을 박물관에서 봤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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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만 마무리가 되어도 득달같이 다음 해의 사업계획을 세우라는 곳에서 살고 있다. 우리 팀은 그런 주기로 돌지만 어떤 사업부는 분기마다 실적을 쪼이고, 회계부서는 월마다 정산 마감을 하면서 일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은 그가 가진 짧은 시간을 어떻게 쪼개어 브루마블 게임을 돌려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게임의 판 위에서 2999년을 생각하는 것은 쓸모없는 황금열쇠를 뽑은 것과 비슷한 일일까. 오늘 따라 일기쓰다가 자꾸 맥이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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