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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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만드는 일은 무척 섬세한 일이다. 주머니를 만들려면 여분의 천을 더 잘라 재단을 해야 한다. 주머니가 달릴 부분의 겉감은 바느질을 하지 않고 띄워놓는다. 그래야 손이 들어갈 자리가 생긴다. 손이 들락날락하는 부분의 겉감에는 심지를 댄다. 심지를 대지 않으면 천이 약해서 해질 수 있다. 그렇게 겉감에 구멍이 난 곳에 주머니를 연결한다. 주머니가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게 밖에서 다시 한번 박아준다. 주머니가 앞 뒤로 움직이지 않고 앞에 고정될 수 있도록 주머니가 앞으로 향한 상태에서 위아래를 박아준다.
2
주머니와 씨름하느라 결국 가디건을 오늘도 완성하지 못했다. 꼬박 네 시간을 바느질했는데도 아직이라니. 옷 만드는 일은 정말 시간 도둑이다. 공방에 가보니 오늘은 못 보던 재봉틀 한 대가 더 들어와 있었다. 흰 실과 검은 실을 바꿔 끼우는 것이 너무 번거로워서 결국 한 대 더 장만하셨다고 한다. 오버록 미싱은 천의 끝을 자르면서 마감을 해주는 기능을 한다. 책상과 한 몸으로 된 공업용 미싱이라 몸집도 크다. 덕분에 내가 사고 싶었던 가정용 오버록 미싱 한 대가 남게 되었다고 해서 반가운 마음으로 덥썩 사겠다고 했다. 몇십 만원이나 하는 가격 때문에 주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원래 사려고 했던 모델의 오버록 미싱을 갖게 되었다.
3
가질 물건은 결국 갖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지난 금요일에는 남편과 백화점에 쇼핑을 갔다. 오래간만에 흐앤무 매장을 둘러봤다. 빨강초록파랑의 자수 무늬가 있거나, 망사가 덧대진 옷, 스팽글 반짝이가 가득한 옷들이 시선을 끌었다. 너무 화려한 옷이 많아서 내가 수수한 것인지, 여기 옷이 떼로 이상한 건지 알기가 어려웠다. 열심히 옷을 사보려고 했으나 결국 살만한 옷을 발견하지 못하고 저녁을 먹고 나왔다. 살까 말까 망설여지는 물건이 있으면 일단 사지 않는다. 왜냐면 나는 정리정돈을 싫어하니까. 물건이 하나라도 덜 있는 것이 삶에 이롭다.
4
공방에서 천과 씨름한 뒤 집에 와서 밥을 했다. 냉장고에서 해동된 돼지고기를 꺼내서 후추와 바질을 뿌렸다. 레시피에 바질을 뿌리라는 말은 없었지만. 고추장 두 스푼, 고춧가루 두 스푼을 넣으라고 했지만 고춧가루는 한 스푼만 넣었다. 굴소스를 넣으라는 말은 없었지만 그것도 좀 넣었다. 마늘은 두 큰 술 넣으라고 했지만 한주먹 왕창 꺼내서 으깨 넣었다. 레시피를 보고도 매번 새 요리를 하게 되는 이유는 이런 것 때문이다. 하라는 걸 정확히 지키지 않는 성격 탓에 요리하면서도 은근히 맛없으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다행히 오늘 요리는 성공. 맵지 않아서 남편이 잘 먹어주었다.
5
따듯한 바닥에서 구르다 깜빡 잠이 들었다. 일어나 보니 청룡영화제가 나오고 있었다.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가 상을 받으면서 엉엉 울었다. 코가 낮아서 친구들이 코 세워준다고 계를 붓고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같이 울면서 하하 웃었다. 여우주연상은 나문희 씨가 받았다. 77세의 여배우는 수상소감에서 먼저 간 친구들을 언급했다. 그에게 지금의 시간은 어떤 느낌일까. 영화제를 보면서 서로 다른 배우들의 개인적인 면을 엿보면서 연말을 돌아보게 된다. 내가 나에게 상을 줄 수 있다면 그 상 이름은 무엇이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