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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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눈을 뜬 건 대학교 때였다. 죽음과 문화라는 수업시간에 죽음과 관련된 그림 한 묶음을 배웠다. 대표적인 그림 시리즈는 햄릿에 나오는 오필리아의 죽음이었다. 오필리아는 사랑하는 남자가 자기 부모를 죽이는 것을 보고 정신이 나가서 물에 빠져 죽는 불운의 캐릭터이다. 덕분에 많은 예술가들이 이 에피소드를 그렸다. 대부분의 그림에서 오필리아의 피부는 파란색이 섞여 칠해진다. 죽은 사람을 뜻하는 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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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바니타스'에 대해서 배웠다. 라틴어로 허무하다는 뜻이다. 화가들이 허무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주로 그림에 해골을 그린다. 그런 걸 한참 동안 배우고 나서 어딘가 생뚱맞게 해골이 등장하는 정물화를 보면 아, 바니타스 정물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해골이 나오는 그림 중에 유명한 것들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등장하기도 한다. 인어공주가 침몰한 배에서 인간들의 물건을 만지며 좋아할 때도 해골이 그려진 그림이 나온다. 이런 걸 알게 되면 그림이 알아봐 지고, 그러면서 좀 더 잘 보이고 재밌기도 하다는 걸 그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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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하기 직전에는 예술철학사를 들었다. 그때쯤 벨라스케스라는 스페인 궁전 화가를 알게 된다. 검색해보니 돈 디에고 로드리게즈 다 실바 이 벨라스케즈라는 엄청 긴 이름을 갖고 계신 분이었네. 이분은 그 시대에 이름을 날린 궁전 화가인데 재밌는 그림을 그리셔서 미술사에 업적을 남긴다. '라스 메니나스' 라는 그림이다. '시녀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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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한가운데 어린 공주가 있고 양쪽으로 시녀 두 명이 있다. 앞에는 광대가 나오고 왼쪽에는 벨라스케스 본인이 그려져 있다. 저 멀리 문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한 명 있고 그 좌측으로는 거울에 비친 왕과 왕비가 그려져 있다. 이 구도에 대해서는 수업 시간 내내 배우게 된다. 당시 화풍을 봤을 때 대단히 혁신적인 시도였던 모양이다. 미술사적 의미가 큰 그림이지만 나에게는 그것보다 흥미를 갖게 된 계기가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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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박민규의 장편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 등장한다. 이 책은 미남과 추녀의 사랑이야기다. 책 내용 중에 지나가다 이 여자를 보면 잠깐 우뚝 서게 될 만큼 못 생긴 외모라는 묘사가 나온다. 이 그림은 그 때문에 등장한다. 이 그림에는 난쟁이로 등장하는 못 생긴 여자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나의 연애 이야기와 비슷했다. 내가 갖고 있는 콤플렉스를 전혀 갖고 있지 않은 남자를 좋아하게 되는 이야기. 그래서 소설 속 여자 주인공에 완전히 이입되는 바람에 역시 소설 후미에 눈물 콧물 다 짜내면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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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메니나스는 마드리드에 있는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림을 보러 간다는 생각만으로 한국에서 출발할 때부터 두근두근했었다. 라스 메니나스는 엄청나게 큰 그림이다. 멀리서 보면 미술책에 나와 있는 것과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물감 자국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보인다. 이 그림을 가까이서 맨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무척 감격스러웠다. 한참을 서성이며 봤다. 그러고 나서 바르셀로나에 가면 피카소가 이 그림의 수많은 버전을 그려놓은 것을 볼 수 있다. 피카소 버전의 추상화된 라스 메니나스를 보는 재미도 무척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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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에 좋아했던 그림은 에바 알머슨의 그림이다. 제목에 첨부한 그림을 그린 사람이다. 누구 그림인지 모르는 사람이라도 화풍을 보면 아 저거!라고 외칠 것이다. 한국에서도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은행 달력에 넣어지기도 하고, 스킨푸드 화장품 케이스에 그려지기도 하고, 의류브랜드와 콜라보해서 옷에 그려 넣어지기도 했다. 에바 알머슨은 따듯하고 행복한 느낌을 주는 인물화를 그린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조그마한 캔버스에 직접 따라 그려보기도 했다. 행복하고 편안한 인물들의 표정을 그리고 있으면 내 기분도 저절로 그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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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보기만 해도 따듯하고 행복해지는 그런 것을 만들고 싶다. 그런 작품들을 많이 보면 언젠가 죽기 전에는 하나쯤 만들 수도 있겠지, 싶다. 오늘 저녁에는 남편이 입을 포근한 가디건을 만들었다. 푹신푹신한 원단으로 된 가디건인데 별무늬가 너무 화려해서 아동복 같다. 완성되면 입고 출근할 거라는데, 왜 내가 두려운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