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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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초가 네 개 있다. 티비 옆에 있는 초는 회사 안내데스크의 밤비가 준 것이다. 높은 선반 위에 올려진 바닐라향 초는 후배인 재인이가 준 거고 낮은 선반에 있는 건 랄라가 제주도에서 사다 준 것이다. 작은 방에 있는 초는 아기를 낳은 친구가 좋은 초인데 켤 수 없다며 내게 준 것이다. 나를 둘러싼 물건들은 이렇게 관계를 통해 이곳에 와 있다.
2
어떤 때에는 관계가 버겁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놀러 갔을 때 거리의 노숙자들이 너무 젊은것이 인상적이었다. 서울역 앞의 노숙자들은 머리가 희끗희끗했는데, 샌프란시스코에는 젊고 사지 멀쩡한 사람들이 침낭 안에 들어가 자고 있었다. 한낮에도 침낭 속에 웅크린 그들을 보면서 저들에게 엄마가 있었다면... 등짝 때려서 집에 끌고 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한편으로 나에게 가족이 없다면 가기 싫은 회사 안 가고 아무거나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멍청한 생각도 해봤었다.
3
자랑스러운 딸이 될 필요가 없다면. 내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관심 있는 사람들이 없다면. 아무도 나를 모른다면. 그럼 나는 자유롭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렇다는 건 자유로운 동시에 돌아갈 곳이 없다는 의미였다. 내가 뿌리 박힌 곳,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추억이 머물고 있는 장소가 없다면 애초에 여행이란 것도 없다. 떠나오기 위해서는 박힌 곳이 있어야 하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애당초 어떻게 살지 선택을 한 건 나인데 괜히 남 탓으로 떠넘기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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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여행하고 한국에 도착하면 엄마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건다. 그러면 엄마는 내가 올 시간에 맞추어 돼지고기가 들어간 김치찌개를 끓여준다. 그러면 나는 여행에서 산 물건들을 거실에 늘어놓고 엄마에게 이런저런 수다를 늘어놓는 것이 진짜 여행의 마무리였다. 익숙한 화장실에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익숙한 이불속에 누우면 언제 여행을 다녀왔나 싶을 정도로 익숙해져 버리는 곳. 집은 그렇게 사람의 마음까지 토닥토닥 안아 재우는 곳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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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라는 건 익숙한 것들과 잠깐 작별하는 시간인 거 같다. 똑같이 판교에 가더라도 회사에 가면 출근이지만 새로운 카페들을 방문하는 게 목적이라면 판교 카페탐방 여행이 될 것이다. 잠깐은 전화가 잘 되지 않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그런 곳들을 방문하는 시간은 사람에게 새로운 쉴틈을 준다. 올해도 그런 쉴틈을 찾아 몇 번의 여행을 가게 될 것이다. 온통 낯선 것들을 보면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별 것 아닌 것도 세상 신기하고, 한국에서도 뻔히 팔 텐데 무겁게 사서 지고 오게 되는 마음. 계획한 여행을 기다리면서 소풍날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또 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