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2
1
교복을 입고 지하철을 타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날 옆자리에 아저씨 한 명이 앉았다. 아저씨는 손을 내 다리와 아저씨 다리 사이에 놓았다. 아저씨 손이 닿는 것이 찜찜해서 일어날 것처럼 몸을 뒤척뒤척했다. 그렇게 하면 손의 위치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치워줄 줄 알았다. 하지만 아저씨는 손을 잠시 들었다가 내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옆 칸으로 옮겼다. 아저씨에게 손을 치워달라고도, 왜 손을 여기 두시는 거냐고도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2
매일 아침 만원 지하철에 낑겨 출근하던 시절에도 그랬다. 엉덩이 부근에 손이 닿는 것 같은데 만원 지하철이라서 우연히 닿은 건지, 의도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뒤를 흘끗 봤는데 체구가 작은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 참다가 환승역에서 내렸다. 다음날에도 똑같은 느낌이 들어서 뒤를 봤는데 같은 남자였다. 보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만원 인파를 헤치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같은 자리에 타지 않았다. 내가 서있던 자리는 환승하는 통로와 가장 가까운 출입문이었다.
3
나는 피해자였지만 가해자들에게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회사 워크샵에서 진실게임을 한다는 자리에서도 난감한 질문을 받았다. 남자친구랑 어디까지 가봤냐는 질문이었다. 사람들은 뭐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 힐난했지만 정색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웃으면서 앞에 있는 벌주를 마셨다. 물 흐르듯 넘어갔지만 기억은 거기에 고정되었다. 며칠 동안 그 질문을 받았던 상황이 계속해서 생각났다. 몇 년이 지나서야 그런 게 바로 성희롱이라는 걸 알았다.
4
꼭 성희롱이나 추행이 아니어도 불쾌한 상황은 종종 있었다. 대학 때는 그런 말을 들어봤다. 너는 옷만 좀 잘 입어도 중상은 갈 텐데. 아니 이게 무슨 말이지? 이런 말은 남자애들끼리 여자애들 외모순위 매길 때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무척 진심으로 나를 안타까워하면서 말하니까 거기서 대놓고 화낼 수는 없어서 하하 웃었다. 작년에는 회사 동료들이 어떤 여성분이 백치미가 있어서 귀엽다고 하는 걸 들으면서 약간 어이가 없었다. 남자한테는 백치미 있다는 말 안 쓴다고 뭐라고 하려다가 그 말을 하면 아니 우리는 좋은 뜻으로 칭찬한 거라고 반발할 것 같은 그림이 그려져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5
오늘은 성추행의 피해자가 된 검사가 뉴스룸에 나왔다. 사람이 많은 장례식장에서 높은 직급의 검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한다. 또 그 일로 인해 부당인사를 당하고 지금은 통영에서 일하고 있었다. 검사 집단 내부에서 성추행뿐만 아니라 성폭행도 일어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여성은 잘 나가는 검사의 발목을 잡는 꽃뱀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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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보면서 가장 씁쓸한 내용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그저 바라만 본 사람들이었다. 피해 검사는 당시 추행을 당하던 순간에 이게 지금 현실이 아니라 판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공개된 공간에서 가해자가 자신의 엉덩이를 만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주 비현실적이었다고 한다. 그걸 보면서 나는 만약에 누군가가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 보게 되었다.
7
내가 대단한 정의의 사도가 아니더라도 뭔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을 것 같다. 적어도 그 사람을 멀리서 '저기요 여기 잠깐만 와보시겠어요?' 하고 불러볼 수 라도 있지 않을까. 그 상황에서 피해자를 꺼내 주기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혹은 그 옆에서 와장창 넘어져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본다거나. 그런 식으로 라도 그 상황을 종결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었을까 생각해봤다.
8
피해 검사는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리고 가해자가 본인에게 한 마디 사과도 없이 종교에 귀의하여 모든 것을 사죄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비판했다. 사과는 직접 피해자에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마지막으로 성폭력의 피해자들에게 당신들은 잘못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피해 검사는 울지 않았다. 눈물을 참기 위해서 드문드문 말을 잇기도 했지만 끝내 울지 않았다. 그 검사가 인터뷰에서 울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여자라고, 동정에 호소해서 여론을 매도했다고, 그런 이상한 시비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눈물을 결국 참아낸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