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4
1
언젠가 친구가 그런 말을 했었다. 행복했던 기억, 웃음이 나왔던 기억이 너무나 오래전이라서 그 느낌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웃으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을 때가 많다고. 그래서 영화를 많이 본다고 했다. 영화를 보고 기뻐하는 사람들 무리들은 어떤 표정을 짓는지 관찰하고, 그 표정을 거울을 보고 따라 해 본다고 했다. 한 번도 돈을 빌린 적이 없는데도 제 삼 금융권으로부터의 빚 독촉 전화에 시달려야 했던 친구였다. 핸드폰을 끄고 배터리를 분리해도 전화벨이 들리는 환청 때문에 고생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2
좋은 기억. 그게 너무 멀어져 버리면 기쁠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될 수도 있구나. 친구의 말을 듣고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행복할 때는 어떤 느낌이었더라, 뭔가 따듯했던 느낌을 열심히 떠올려야 아주 어렴풋하게 떠올릴 수 있다고 친구는 말했다.
3
행복의 기억은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해리포터를 보면 다가오는 디멘터를 물리치는 힘은 가장 행복했던 기억에서 나온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주문을 외워야 효력이 있다. 디멘터는 가까워질수록 사람을 우울하고 불행하게 만들고 결국엔 끔찍한 고통을 느끼게 한다. 신체적 고통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에 빠뜨려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나는 디멘터의 설정이 정신질환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사람이 정서적으로 고갈될 때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결국 마음속의 따듯한 기억이 아닐까.
4
회사에서도 사람에 기대어 조금씩 살아간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도 같이 스터디하는 사람들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아무 말 대잔치를 열었다. 대단한 정보교환은 없다. 영양가 있는 말도 별로 없다. 나는 회사에서 앞구르기를 해보고 싶지만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는 말을 했다. 누군가는 지금 벌렁 눕고 싶다고 했다. 다른 한 명이 누우면 되잖아요, 하고 대꾸하자 뒤에 있는 의자에 벌렁 누웠다. 그냥 그런 이야기들을 하다가 자리로 돌아왔을 뿐인데 무척 고마운 기분이 들었다.
5
흔히 취업을 하는 초년생들은 이런 조언을 듣게 된다. '사회생활'을 잘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잘 해야 한다는 말이 일을 잘하라는 말과 약간 다르다는 걸 안다. 어떤 때는 '저 사람 사회생활 잘하네' 같은 말이 칭찬이 아닌 경우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간혹 나는 사회생활을 너무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예전 같으면 쉽게 했을 수도 있는데, 이제는 점점 더 잘 못하게 되는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상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집단이 점점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