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월 일일 저녁

D-15

by Lucie

1

퇴근을 하고 서둘러 저녁을 차렸다. 흰 냄비를 불에 올려 다시마와 멸치, 무를 넣고 끓였다. 육수가 끓는 동안 야채를 넣은 밀폐용기를 꺼내서 있는 걸 몽땅 썰었다. 어묵과 애호박을 넣어 끓이다가 숙주, 파, 버섯, 깻잎을 마저 넣고 잠깐 뚜껑을 덮었다. 엄마가 해준 반찬들을 냉장고에서 꺼내서 어묵탕이랑 같이 먹었다.


2

남편과 나는 늘 저녁을 먹으면서 뉴스룸을 본다. 뉴스룸은 우리 부부의 최애 프로그램이다. 오늘도 MB의 다스 의혹과 특별사면 이야기, 서검사의 성희롱 관련 후속보도, 삼청교육대와 평창올림픽 이야기를 보면서 흥미진진하게 밥을 먹었다. 뉴스가 제일 재밌는 나를 보면... 아재가 된 것 같다. 어렸을 때 아빠가 뉴스나 토론 프로그램을 좋아했던 걸 이해할 수 없었는데, 내가 이제 그런 어른이 되어 있다. 좋아하는 케이맨 아일랜드라는 노래를 들으면 MB 비자금 의혹을 떠올리게 돼버리는... 그런 아재 연상능력자가 되어버렸다.


3

오늘은 이월의 첫날이었다. 여느해처럼 올해도 시간이 빠르다. 올해도 벌써 좋아하는 지인들이 두 명이나 회사를 그만두었다. 퇴사자가 그렇게 많은 회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잘 아는 사람들이 나가는 것은 마음이 휑한 일이다. 그래도 일월에 열심히 노력한 보람이 있어서 이번 달에는 우리 팀에 신규 입사자가 들어온다. 백 개에 달하는 이력서를 모두 찬찬히 보고 많은 고민을 해서 만나게 된 팀원이라서 기분이 남 다르다. 새로 들어오는 분과 함께 일할 생각에 조금 들뜨는 마음이다.


4

우리 회사는 인사팀을 피앤씨팀이라고 부른다. 피플앤컬쳐의 줄임말이다. 나는 피앤씨팀으로 입사해서, 피앤씨팀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가, 또다시 나간다. 이번 달에 다른 소속으로 발령이 나게 될 것이다. 하는 일은 여전히 크게 변하지 않는다. 가만히 있어도 변화가 많이 있는 회사에 다닌다는 것은 신나고 이상한 일이다. 나는 단지 신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맨날 회사가 변하는 건 이상한 거예요,라고 누군가 나에게 말해주었다.


5

저녁에 엔사에 다니는 지인에게서 카톡이 왔다. 엔사 인사팀에서 사람을 뽑는다고 지원해 보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구인 희망연차에 4년차 이상 8년차 미만이라고 써져있었다. 문득 몇 년이나 일했나 헤아려보니 올해로 9년차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연차이지만, 참 할 줄 아는 일도 별로 없는데 회사는 많이 다녔네 싶었다. 아직은 새 팀원이 오는 일로 고무되어서 이직할 생각은 별로 없다. 다만 그 공고를 보면서 나라는 사람의 일할 줄 아는 능력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6

밤늦게 까지 책상에 앉아서 집중하던 한때는 내가 일을 잘한다고 생각했었다. 오늘은 지인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저도 이제 어떤 게 일을 잘 한 거고 못한 건지 보는 눈은 있거든요. 제가 만든 슬라이드를 보면 되게 별로예요. 아 이렇게 만들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은 드는데 고치려고 하니까 어떻게 고쳐야 할지 막막하고 또 그렇게 시간 들여하기도 싫고...


7

지금 하는 일을 오래 해야 한다는 의지도 없고, 꼭 이 회사여야 한다는 생각도 없다. 그래도 혼자서 좀 더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글쓰기도 매일 이렇게 생각의 골짜기만 헤짚을게 아니라, 계획된 길로 흐르게 하고 싶다. 하도 인생이 즉흥적이라서 글쓰기라도 매일 하면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쌓아가야 할 것이 많은 것 같다. 글을 쓰는 어깨가 쳐진다. 나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나를 데려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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