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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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신분당선을 탔다. 처음 판교에 출근할 때만 해도 이 동네가 이렇게 별천지가 될 줄은 몰랐다. 근처에 있던 삼성 계열사들은 붉은 로고를 두른 한화 계열사가 되었다. 예쁜 상가거리를 일층에 둔 아파트가 들어섰고 백화점도 생겼다. 더 많은 회사들이 입주한 판교역에는 출퇴근 시간 사람들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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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 내려가는 역출입구 에스컬레이터부터 줄이 생길 정도다. 역으로 가는 도로는 꽁무니에 빨간 브레이크등을 킨 차가 가득하다. 회사에서 역까지 가는 셔틀버스가 있지만 날이 좀 풀려서 걷기로 했다. 셔틀버스 앞에도 긴 줄이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가벼운 에코백을 덜렁덜렁 흔들며 걸었다. 가는 길에 좋아하는 빵집을 발견했다. 빵을 사서 내일 아침밥으로 먹을까 하다가 약속 시간에 늦어서 그냥 가던 걸음을 옮겼다. 내일은 토요일이니까 맛있는 빵을 아침에 사서 먹어도 된다. 기분이 좋아졌다.
3
가방에는 콜라 하나가 들어있었다. 사람으로 붐비는 지하철은 나에게 공포의 공간이다. 의사는 패닉의 전조증상이 있을 때 물을 마시면 도움이 된다고 일러주었다. 그래서 물을 챙겨 가려고 했는데 마음은 급하고, 생수를 살 시간이 없어서 자리에 있던 콜라 한 캔을 가방에 넣고 나온 것이었다. 승강장으로 들어서자 마침 도착한 지하철에 사람들이 타는 중이었다. 나도 빨려 들어가는 무리의 한 명이 되어 열차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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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무서운 순간이다. 열차에 타고 문이 닫히기 직전. 사람들이 가득 찬 열차 안은 갑갑하다. 사람이 빼곡해서 내가 이동할 통로도 확보되어 있지 않고, 난방이 되고 있어 실내가 덥다. 문이 닫힌다는 승강장 경고음이 울린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어지럽다. 이때를 못 견디면 내려야 한다. 내리면 다음 열차를 내가 탈 수 있을까 또 걱정하며 시간을 보내야 한다. 다행히 가방 안에 콜라가 있다는 게 떠올랐다. 힘들면 일단 이걸 마시는 걸로 응급처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약간 안도감이 들었다. 덕분에 내리지 않고 출발하는 열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5
한 번에 지하철 탑승에 성공하면 기분이 좋다. 약속 시간에도 더 늦지 않을 수 있고, 일단 출발만 하면 그다음부터 참는 것은 좀 더 수월하다. 의사는 나에게 공황장애 치료약을 다섯 알 정도는 먹어야 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두 알만으로도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졸렸고, 나는 그냥 약을 끊어버렸다. 그 뒤로는 몇 년간 안정제와 함께 다녔다. 가방에 안정제와 물이 있어야 안심하고 지하철이든 비행기든 탈 수 있었다. 그래도 그 시기를 지나서 가방에 마실 것만 들어있어도 지하철을 탈 수 있게 되었다. 이만큼 회복해준 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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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노력 없이도 불편함 없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몸이었다. 살이 찐 적도 특별히 운동신경이 나빴던 적도 없었다. 오빠처럼 알레르기가 있어서 고생한 적도 없고. 그렇게 편리하게 버텨주던 몸이 갑자기 고장 난 것이 억울했었다. 왜 내가 숨을 못 쉬고 기절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치료하겠다고 먹은 약 몇 알에 모든 생활이 무너지는 것이 황당했다. 신체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애당초 몸이 배제당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내 신체를 위한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살았으니 어느 순간 단단히 고장 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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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금은 그전까지 대단히 잘 버텨준 몸에게 고맙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나의 몸과 마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지, 하는 마음이다. 오늘 지하철 혼자서 씩씩하게 탄 나를 기특하게 생각한다. 쓰담쓰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