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덜

D-27

by Lu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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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여행을 가려고 정보를 찾아보면 이런 것들이 나온다. 이 지역의 맛집 베스트 파이브. 꼭 들러봐야 할 명소 탑 텐. 야경 명소 베스트 쓰리. 사람들은 이미지를 본다. 멋진 숲이나 화려한 건물,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음식 사진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거기에 마음을 빼앗긴다. 저기 가서 저걸 꼭 볼 테야, 저기 가서 저걸 꼭 먹어볼 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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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것들을 최대한 많이 보고 많이 먹어볼 수 있는 동선을 짠다. 그리고 그 동선대로 움직인다. 나도 여행을 가기 전에는 그런 식으로 정보를 찾아보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여행 계획은 헐겁다. 그냥 가고 싶은 데를 접어두었다가 비행기 안에서 몇 개 추린 뒤에 가보는 식이다. 시간도 헐겁다. 생각한 걸 대충 봤는데 시간이 남는 경우도 허다하다. 애당초 빡빡한 계획을 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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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식은 여행뿐만 아니라 인생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몇 년 전 나의 리더는 나에게 말했다. 더 뛰어나고 더 훌륭한 사람이 되셔야 해요. 나는 대답했다. 저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는 목표를 갖고 있지 않아요. 리더는 나를 설득하고 싶어 했다. 아등바등 살아야 중간 정도 가는 거예요. 그런 마음으로는 중간도 갈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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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더 성장하기를 바랐던 마음을 이해한다. 나도 가능하다면 무척 인정받는 사회인이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누구라고 그런 성공의 자리가 한 번쯤 탐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피곤하고 지쳤고 인내심이 대부분 소진되었다. 인정받는 사회인이 되려면 여행지의 모든 명소에서 아름다운 사진을 남기는 것 같은 일을 해내야 한다. 무척 전략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을 때 가능하다. 전략적 행동을 한다는 건 어떤 상황에서 내 리액션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싫은 걸 보고도 좋다고 하기도 하고, 좋은 걸 보고 별로라고 말하기도 하는, 그런 걸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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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심이라기보다 나는 아마 어느 순간 참기를 포기한 듯하다. 그게 공황장애에 걸렸었기 때문인지, 막살아도 생각보다 불이익이 없었기 때문인지 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일 대부분의 시간에 많이 참는다. 내가 프로 불편러라서 그런 걸 수도 있다. 굳이 나를 공격한 것은 아니지만 불편한 순간이 많다. 아무도 나를 힘들게 하지 않는데도 그래서 힘겹게 퇴근을 할 때가 많다. 역시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은 나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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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친구를 만나서 저녁을 먹고 함께 차를 마셨다. 늘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 시간이 없다가 죽게 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옛 추억만 이야기할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도 오 년 뒤, 십 년 뒤에 추억할 수 있게, 즐거운 걸 같이 해보자고 이야기를 했다. 좋지 않은 감정에 매일 것이 아니라 즐거운 감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활동에도 더 신경을 써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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