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것

D-31

by Lucie

1

어렸을 때는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토요 미스터리>나 <전설의 고향> 같은 것이다. 일본의 어느 사찰에 가면 여자 어린이 형상을 한 목각이 스스로 움직인다는 얘기도 나오고, 고전 속 귀신도 종류별로 알게 되었다. 구미호는 사람의 간을 먹는다는 것도 그때쯤 알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를 열심히 보면 일상 속 무서움도 심해졌다.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는 유난히도 나무가 무성했는데, 학원 끝난 후 해진 귀갓길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경비아저씨가 있는 곳까지 우다다 달려가야 한숨 놓이곤 했다.


2

무서운 이야기 중엔 이런 것도 있었다. 창밖에 할머니가 여기가 몇 호냐고 물어봤는데 그 집은 사실 십 층이었다는 이야기. 나는 칠 층에 살았고 내 방에도 창문이 하나 있었다. 그 창문으로 귀신이 여기 누구네 집이냐고 물어볼까봐 밤에는 꼭꼭 커튼을 쳤다. 머리를 감을 때 눈을 감으면 천장에서 귀신이 나와서 자기 머리도 같이 감는다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귀신 머리를 같이 감아주게 될까 봐 되도록 눈을 뜨고 머리를 감았다.


3

좀 더 커서는 사람들의 잔인한 계획이나 음모가 무서웠다. 인간 병기를 키워내는 <몬스터>나, 초딩 때 친구 싸움이 전 지구적 싸움된다는 <20세기 소년> 같은 만화가 그랬다. 20세기 소년 같은 경우는 몇 권 읽다가 머리맡에 두고 자려고 하면 그 책이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 기분이 오싹했다. 만화방에서 담아준 검은 비닐봉지에 다시 책을 넣어서 멀리 방구석에 두어야 잠이 왔다.


4

나이가 서른이 되니까 어렸을 때보다 훨씬 딱해졌다. 발톱이 무시무시한 구미호나 인간병기를 키우는 글로벌 스케일의 계획 같은 건 무서워할만한 거리라도 되는데. 요즘 내가 무서워하는 것은 주말의 남산터널 같은 것이다. 터널 안에서 차가 막히는 상황이 정말 너무 무섭다. 교통상황을 보고 터널 내에 교통체증이 있으면 그냥 멀리 돌아서 집에 간다. 새로 뚫린 서울-양양 고속도로에 엄청나게 긴 터널이 있다는 말을 듣고 절대 그길로 강원도를 가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5

내가 폐쇄공포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공포증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 회사에서 앞자리 동료는 환 공포증이 있다고 했다. 어느 날 후드 안쪽에 자잘한 별 무늬가 있는 옷을 입고 출근했더니, 동료가 나에게 진지하게 부탁을 해왔다. 그 옷의 무늬가 공포스러워서 앞을 볼 수가 없다고 했다. 그 뒤로 그 옷을 회사에 입고 가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동료는 샤워하다가 바닥에 맺힌 물방울 때문에 식겁할 때가 많다고 했다. 자잘한 씨 때문에 딸기도 못 먹는다고. 생각보다 다양한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6

폐쇄공포를 동반한 공황장애가 걸리고 나서 처음 비행기를 탈 때 무척 걱정이 되었다. 혼자서 떠나는 여행길이었는데 또 어디서 발작이라도 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에 '공황장애'가 영어로 뭔지 검색을 해봤다. panic disorder라고 한다. 해외에서도 다급한 상황이 생기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단어를 외워간 것이다. 단어를 찾아보면서 공황장애 환자용 목걸이나 팔찌 같은 물건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다급하면 말도 안 나오니까, 보여줄 수 있는 용도로 쓰면 좋겠다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시댁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