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2
1
대학교 때 조금 유별난 교수가 있었다. 강의가 시작되면 첫 시간에 신상기록지 같은 걸 나눠주는 분이었다. 학생들은 그 빈칸을 채워서 제출해야 했다. 써야 하는 것 중에는 부모님의 직업 같은 것도 있어서 무척 개인정보침해스러웠다. 하지만 선배들은 '취미'를 적는 것에 가장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 거기에 노래나 춤 같은 즉석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적으면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그걸 시킨다는 것이었다. 나는 사전에 그 정보를 접하고 거기에 '노래'라고 적어 넣었다. 시키면 트로트를 한 곡 부를 생각이었다.
2
진짜로 시켰는지 어쨌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준비를 했으니 아마 시켰었다면 불렀을 것이다. 그 교수님 수업은 친분에 따라 학점 나오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조장도 하려고 애쓰고, 발표도 하고 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교수님과 안면 트고 지내는 데 성공했고, 다음 해에도 그 교수님 수업을 한 번 더 들었다. 물론 학점은 모두 에이뿔이었다.
3
학점은 곧 장학금과 연결되어 있었다. 학점을 잘 받으면 등록금을 삼 분의 일만 내면 되었기 때문에 나는 높은 학점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목적이 있고 방법을 안다면 그걸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만약에 굳이 학점을 잘 받을 필요가 없었다면 아마 그 교수 수업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혹여 듣게 되었더라도 취미란에 소설 읽기 같은 걸 적었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답이 아니라 그냥 진짜 있는 그대로를 적었겠지.
4
첫 직장을 들어갈 때는 이왕 대기업에 들어갔으니 상무까지 승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화장실이고 복도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회사내의 활동에도 관심이 많았다. 본 업무 외에 사내 방송이나 노사협의체, 동호회 활동 같은걸 왕창 했다. 회사를 옮기면서는 새로운 목표를 갖기도 했다. 한 때는 능동적인 사람들이 몰입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전문가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이 목표를 갖고 회사에서 일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었다. 실패할 때도 있었지만 시행착오 역시 어디서도 배울 수 없는 소종한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5
그 목표가 사라지고 나는 영 갈피를 못 잡고 있다. 한국이 아닌 나라에서 일정 기간 살아보기, 라는 목표를 갖고 있지만 그걸 위해서 지금 당장 노력하고 있는 것은 없다. 매일 짧게라도 생각을 정리하려고 노력하지만 일상을 적어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백일 동안 예닐곱 문단으로 써 내려간 텍스트는 분량만 해도 상당하지만, 이것은 특정 주제로는 잘 엮이지 않는다. 누군가 읽을 만한 책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해봐도 역시 이건 그냥 나 혼자만의 일기에 지나지 않는다.
6
간혹, 내 욕심에 나를 보채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난 또 뭔가를 잘 해내고 싶은 거지. 하도 잘한 것이 없는 요즘이라서 책을 낸다는 대단한 성과에 집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 책을 내도 그만, 안 내도 그만인 것인데. 이왕 쓰는 거 출판사에서 내줄 만한 것을 써야지. 이왕 책을 내는 거면 대박이 나면 좋지 않을까. 그런 성공의 허황된 심상에 약간 사로잡힌 것 같다. 도대체 책으로 쓸만한 주제는 내 인생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울하다.
7
적당히 불행하고 적당히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중상위권의 성적으로 살아온 학생이 회사원이 되었다. 이것이 내 삶의 요약이다. 지구 상 모든 회사원의 과반수에게 적용될 법한 문장이기도 하다. 내일 출근해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건가. 하지만 월요일의 멘탈은 재봉틀 동호회가 붙들어 준다. 동호회 생각하면서 다시 마음을 추슬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