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ue Colors

D-33

by Lu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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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해적이 되고 싶다던 친구가 있었다. 이렇게만 쓰니까 '학교'라는 게 초등학교처럼 이해될 것 같다. 무려 대학교 때 친구다. 친구는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장난 아니고 진짜라고. 나는 정말 해적이 되고 싶은데 부모님도 그렇고 아무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아, 친구는 말했다. 나는 물었다. 네가 말하는 게 진짜 해적이야? 너 해적이 뭔지 알아? 친구는 안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는 그래도 해적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 친구는 지금 금융회사에 다닌다.


2

한 친구는 최근 문신을 했다며 손목을 내보였다. 외국어로 예쁘게 써진 문구였다. 문신에만 집중하는 나에게 친구는 설명했다. 어렸을 때 하도 손목을 그어서 흉터가 남았는데 보기 싫어서 문신한 거야. 그제야 문신 뒤에 희미한 흉터들이 보였다. 씩씩한 걸로는 손에 꼽힐만한 친구인데 어떤 때에는 무척 약해지기도 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3

그러고 보면 사람이란 참 알 수 없다. 연애할 때는 정말 별로라고 생각했던 친구 남친이 결혼 후에는 무척 달라졌다거나, 앞에서는 상냥했지만 뒤에서는 나에 대해 험담하는 사람 때문에 상처받은 적도 있었다. 해적이 되고 싶다던 친구는 한 회사를 거의 십 년째 다니고 있고, 씩씩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극도로 좌절하는 순간이 올 수 있다.


4

이런 걸 보고 친구 J양은 인간 다면체 이론을 주장해 오고 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여러 가지 면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황에 따라 다른 얼굴을 내보일 수 있다. 멀리 가지 않고 내 남편만 봐도 회사에서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상상하기 어렵다. 남편은 나랑 있을 때는 수다도 잘 떨고 매사에 무척 침착하다. 하지만 회사에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이 말 붙이기 어려운 면모를 보이며 회의 때는 흥분하기도 한다는데,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한 번도 못 본 사람이라 너무 궁금하다. 남편이 일하는 걸 몰래 훔쳐보고 싶을 정도다.


5

나도 물론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만만한 캐릭터라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사실 속은 쭈구렁 하다. 대부분의 관심종자들이 갖고 있는 특성일 거라고 생각한다. 외부의 인정이 꾸준히 공급되지 않으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굴 해진다. 예전에는 이런 걸 인정할 수 없거나, 혹은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비밀을 털어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면서 이런 사람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내가 감춘다고 하더라도 감춰지는 게 아닌 것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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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서 나의 진가는 이런데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을 좀 더 예리한 시각으로 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이런 태도는 나에게 여러 가지 이득을 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내가 나를 더 잘 알고 그걸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잘 맞는 친구들을 만나기가 쉬워진다. 나를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대화 상대가 있다는 것은 존재만으로 마음의 위안이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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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내 특성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아마 어떤 돌의 색이 아닐까 싶다. 그냥 지나치면 회색인데 비가 오면 까만색이 되고,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흰색, 검은색, 초록색 온갖 색이 다 섞인 돌덩어리 같은. 무슨 색이라고 딱히 표현하기 어려워서 평소에 돌직구 스타일로 이야기를 하니까 돌 색깔을 갖다 붙여봤다. 색만 돌이 아니라 단단하기도 돌 같아서 부서지지 않고 떼굴떼굴 잘 굴러다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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