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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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도 써야 하는데, 배도 먹고 싶다. 일기를 쓰고 나면 배를 먹기엔 너무 늦을 것 같다. 그렇다고 글쓰기를 제쳐 놓고 배를 깎아 먹자니 찜찜하다. 배가 혼자서 껍질 벗고 접시에 착 누워있으면 좋을 텐데. 자동으로 배 깎아주는 기계는 아직 없나. 세상은 아직도 자동이 아닌 것 천지다. 어떤 시대 사람들은 옛날엔 식재료를 저온으로 보관하는 기계에 넣었다가 꺼내서 직접 손질해 먹었단 말이야?! 하고 놀라워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미개한 시절에 살고 있다는 기시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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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써보려고 했던 것은 아르바이트에 대한 것이었다. 호주에서도 일 년을 알바로 먹고살았고, 고등학생 때부터도 돈 필요하면 틈틈이 알바를 했기 때문에 에피소드들은 많다. 아르바이트하다가 사장님 스케줄 잘못 입력해서 호텔 조찬을 하루 이르게 보내드린 적도 있었고, 홍수로 전력이 끊긴 날 레스토랑 알바하다가 손님 홍수가 터진 날도 있었다. 재밌는 일도, 힘든 일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신나고 행복한 기억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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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돈이 필요해서 시작한 활동 이어서일까. 대개 아르바이트는 시급을 받기 때문에 시간을 넣으면 돈으로 나오는 시스템이었으니까. 한창 알바를 할 때는 갖고 싶은 물건을 보면 노동시간으로 계산되어 나왔다. 호주에서 일 년 살 때는 단돈 십 달러 짜리 물건을 살 때도 이거 한 시간 시급이라는 생각이 들어 선뜻 돈이 써지지 않았다. 그런 생활이 지금은 월급으로 바뀌어 환산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시간을 넣으면 돈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력도 좀 같이 쌓여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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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결국 또 어떤 이야기를 이어쓰기 어렵다. 물끄러미 옆에서 모니터에 몰두하고 있는 남편 얼굴을 본다. 남편은 불평하거나 푸념하는 일이 거의 없다. 내가 이 사람의 반의 반이라도 좀 따라가야 할 텐데. 괜히 새로 산 천을 책꽂이에 대보며 어울리는지 봐달라고 한다. 결국 오늘도 방해꾼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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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집 앞이라도 한 바퀴 뛰어야겠다. 잡념도 떨치고 활기도 되찾을 겸 몸을 써서 머리를 정화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그런데도 내일 일기도 이런 식이면 모레는 회사에서 하는 명상시간에 꼭 가서 참여를 해보도록 해야겠다. 매일매일 더 건전한 생활을 쌓아 올려서 이런 매가리 없는 일기가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극복을 위한 한걸음을 디뎌야지.